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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리의사 Jun 16. 2024

제주도 대신 병원

병원 여행기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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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 혼자서 제주도를 갈 계획이었다. 아내에게는 미리 말하고 허락을 맡아 두었다. 9월이어야 했다. 7, 8월은 사람이 너무 많고, 10월은 물이 차가우니까. 9월 초에는 수영하기 적당한 수온에 사람도 없어 협재 바다가 온전히 나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샤워장이 굳이 필요 없었다. 샌드 호텔이 협재 해수욕장 바로 앞이기 때문이다. 2박 3일간 수영하고, 낮잠 자고, 글을 쓸 예정이었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송악산이나 절물 휴양림에 드라이브 겸 다녀올 생각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협재 해수욕장>

 캐리어에 짐을 싸고, 가방에 노트북을 넣은 채 제주도 대신 병원에 왔다. 병원에서 대략 500일 정도를 숙박했으니, 병실 또한 익숙했다. 병원에서 자면서 환자를 살리기도 했고, 환자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그땐 의사였고, 지금은 환자다. 원무과에서 입원 수속을 하고, 혼자 병실로 올라왔다. 아내는 퇴근 후 저녁 늦게 병원에 오기로 했다. 아이 둘은 어머니께서 맡아주시기로 했다. 나는 아내가, 아이들은 어머니가, 환자는 다른 선생님들이 맡아주셔야 한다.


아파서 서럽기보다, 아파서 미안했다.

 "1, 2인실을 쓰시겠어요?"

라고 원무과 직원이 물었다.

 "5인실로 할게요."


 5인실이 궁금했다. 1인실은 아내가 출산할 때, 2박 3일간 보호자로 생활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레지던트 1년 차로 30일간 당직을 서다 나온 첫 오프가 아내 출산이었다. 출산 휴가 2박 3일 동안 내내 먹고 잤다. 아내가 아니라 내가.  


 병실로 올라가자, 간호사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종교 있으세요?"

 "아뇨."

 종교뿐 아니라, 가족 관계, 음주/흡연, 과거력 등으로 질문이 이어졌다. 이러다 하루에 팬티를 몇 번 갈아 입느냐?라는 질문도 나올 것 같았다. 기초 조사가 끝나자, 병동 생활에 대한 안내가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나왔다.


 "왜 계속 웃으세요?"

 "죄송합니다. 의사인 제가 환자가 된 것이 어색해서요."


웃음이 아니라 실소가 나왔다. 의사에서 환자가 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저녁에는 교수님 회진이 있을 예정이었고, 저녁 8시부터 금식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저녁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당분간 나는 환자도 없고(내가 환자니까), 가족도 없다. 순수히 나만 남았다. 5인실이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2명밖에 없었다. 의대 증원 관련하여 전공의가 없어 환자가 줄어든 모양이었다.  


하얀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의 협재해수욕장 대신 하얀 시트와 핑크 이불이 보였다. 제주도 대신 병원을 여행하고 기록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시간이 안 가지만, 무엇을 하니 시간은 잘 갔다. 교수님 회진 시간은 오후 4~6시였지만, 오지 않았다. 다만 저녁이 되어 밥이 나왔다. 내일 아침도 점심도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한 끼가 더욱 소중해졌다.  

 된장국 맛집이었다. (나중에 된장국을 먹어 본, 주부 10단 아내 또한 같은 의견이었다.)


 7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수술복을 입고 교수님이 혼자 회진을 오셨다. 흰색과 검은색이 반반 섞인 머리가 떡이 져 있었다. 옆에는 전공의도 간호사도 없었고,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땀냄새가 풍겼다. 수술 동의서는 저번에 외래에서 받았고, 이번에는 마취 동의서였다. 보통은 마취과 전공의가 받는데, 인력이 없다 보니 수술과 의사가 직접 받는 모양이었다. 내일 수술이 다섯 개가 있는데, 가장 어린아이가 첫째고, 가장 젊은 내가 마지막이어야 하나, 환자 중 한 명이 B형 간염이 있어 그 환자가 끝이라고 했다.


 수술은 어느 병원에서든지 어린이> 노인> 젊은이 순서다. (단, B형 간염, C형 간염, 에이즈, 매독 감염병이 있는 경우 다른 사람에게 옮길 있으므로 가장 마지막이 된다.)  

 

  아내는 밤이 되어서야 왔다. 큰 수술도 아니라서,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굳이 왔다. 병원에서 처음으로 밤을 맞이했다. 의사가 아니라, 환자로. 잠이 안 올 것 같았지만, 몸이 피곤해 곧 잠에 빠졌다. 그러다 아파서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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