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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 안 Mar 15. 2023

우리가 함께 피운 꽃이

세 번째 이어짐

길을 걷는 중에 장미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누구라도 그걸 굳이 밟고 지나가는 이 있을까. 누가 그럴까. 길 위에 무수히 깔린 낙엽 위를 부스럭부스럭 지나가는 것은 아마도 무의식적인 행동이겠지만, 장미꽃을 밟아 짓이긴다는 것은 꽤나 께름칙한 일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의식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나뭇잎에겐 퍽 서운한 일일지는 모르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나뭇잎과 장미의 존재감은 뚜렷이 다르다. 설사 누군가 장미꽃을 굳이 밟고 지나간다 해도, 혹은 장미꽃 위를 폴짝 뛰어 넘어 간다 해도, 둘다 장미를 의식한 행동임엔 다름이 없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장미를 의식하면서 살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더 우월하다거나, 혹은 우리의 삶이 그들의 그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가치란 값어치처럼 무엇이 무엇보다 더하거나 덜한 것이 아니니까. 다만 세상이 그런 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장미로 태어난 것만큼이나.


언젠가 고등어무늬를 한 길고양이가 나에게 가시를 왜 내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장미라는 꽃에겐 「유난히」 가시가 있느냐고. 유난스럽다니. 나의 가시와 나는 유난스럽지 않다. 나는 장미일뿐이다. 진실과 장미에게는 가시가 있는 법. 가시가 있어야 장미이거늘, 그것에 이유를 묻는 바보 천지가 세상에 어디 있나. 그것은 마치 고양이 본인에게 뾰족한 귀가 두 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에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그 또한 황당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를 부정받지 않기 위하여 가시를 내는 것이다. 오직 장미만이 장미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이 왜 지금 문득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만약 나에게 가시가 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이유만으로 장미가 아니게 되는 걸까? 그 고양이에게 쏘아붙이듯이 했던 내 대답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을까.


내게 물 한 번이라도 준 적 없는, 나랑은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제 멋대로 나에게 ‘열렬한 사랑’이라느니,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꽃말」이라는 것을 갖다 붙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의미」란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삶은 각자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한 종을 싸잡아 의미를 정해버리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얼마나 교만한 발상인가. 그 누가 감히 그럴 권리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의미는 「되는 것」이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장미에게 꽃말 따위의 의미부여는 필요 없다. 나란 장미는 장미답기 위하여 살았고 그걸로 충분히 충분하다. 장미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붉은 것이다. 향이 진한 것이다. 여름을 대표하는 것이다. 주체적인 것이다. 고혹스럽고 매혹적인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도도 한 것이다. 독보적인 것이다. 숨지 않는 것이다.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당당한 것이다. 용기 있는 것이다. 가시 돋친 것이다. 진실된 것이다. 적어도 나란 장미는 그렇게 살았다.


많은 꽃들이 그저 이쁘다는 이유로 온실 속에서 키워진다. 그 꽃들에게는 계절은 물론 날씨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비라는 것은 우중충해진 비닐 천장 위를 타닥타닥 때리는 소리일 뿐이요, 눈이라는 것은 하얀색이 아닌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 것일 뿐이다. 필요 이상의 햇빛은 비닐에 걸러지고, 온도는 언제나 너무 덥지 않게, 너무 춥지도 않게 보온되고 보존되며, 꽉 닫혀있는 문 덕분에 한 점의 바람도 맞을 일이 없다. 그들을 갉아먹는 벌레는 물론 나비나 벌에게도 온실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질서 정연하게 정해진 거리로 심어진 그들에겐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물이 뿌려진다. 그 꽃들이 뭘 알겠는가. 그저 일평생을 라텍스 장갑을 낀 손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길러지다가 가장 이쁠 때쯤에 잘려나간다. 그러면 그들에게 값이 매겨지고 사람들은 돈을 기꺼이 지불하고 선물을 하며, 받은 이는 이를 꽃병에 물을 담아 꽂아 놓기까지 한다. 「이미 싹이 잘려 죽어있는 것을 말이다.」 물에 담겨있는 불쌍한 꽃은 자기가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도 아마 모를 것이다. 그것을 싱싱하다고 표현하는 것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내가 장미임에도 - 그야말로 꽃 중의 꽃이면서도 - 그 누구의 도움 없이 당당히 이 모든 날씨와 모든 겨울을 다 받아들이고 견뎌내며 살아가는 것에 스스로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나의 아름다움이다. 자의식과잉이라고 해도 좋다. 어쩔 수 없다. 이 정도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있어야 내가 나를 믿고 살 수 있다. 바람에 흘러 전해 듣기로, 예전에 누군가가 제멋대로 “담장에 기대어 자라는 식물”이 장미의 어원이라 했다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대어 살지 않았다. 평생을 장미로서, 모든 이가 장미에게서 바라는 것을 나는 해냈고, 지키며, 부끄럽지 않게, 어디 하나 모자라지 않은 장미로 살았다.


십 년 차 장미로서, 나는 직감할 수 있다, 나의 마지막 봄이 드디어 목전이라는 것을. 나는 여름에 피는 꽃이기에, 그만큼 봄이 중요하다. 겨울의 시작부터 내가 기다리고 바라던 것은 단 하나, 그저 겨울의 끝이었다. 그러니 겨울의 아무리 미세한 변화라도 그걸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할 일이었다. 겨울이 서운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결국 여름에 피어나는 꽃. 겨울, 당신은 나에게 그저 견뎌내야 하는 고난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당신이 예전 같지 않다면 나는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어제는 마냥 춥고 건조하기만 했던 새벽녘의 이 시간에게서 오늘 나는 소량의 봄내음을 맡을 수 있다. 하늘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톤은 좀 더 높아진 것 같고, 땅 밑의 지렁이들도 조금씩 꿈틀대는 것이 느껴진다. 필시 봄이 머지않았다.


하지만 방심치 말고 조금 더 버텨야 한다. 따뜻해지는 온도에 봄이구나 싶어서 섣불리 봄맞이 준비를 시작했다간 줄기가 아직 제 컨디션이 아닌 상태로 꽃샘추위에 된통 당하는 수가 있다. 지독하고 매몰차던 겨울을 잘 버텨놓고 이제 와서 급할 것은 없다. 우선 봄비가 내리기를 진득하게 기다리면 된다. 때가 되면 봄비가 내릴 것이고, 그다음엔 꽃샘추위가 올 것이다. 그러면 완연한 봄이 어련히 알아서 온다. 반드시 온다니까. 겨울 동안은 그렇게나 길고 추울 땐 그렇게나 추웠으면서 막상 봄이 오면 세상이 따뜻해지는 데는 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인내하면서 올해에는 또 몇 송이의 꽃을 피울지 계획부터 세워보자.


마지막 봄이라고 해서 하나도 다를 것은 없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언제나처럼 올해의 목표도 역시나 바로 전 해보다 조금이라도 더 고고하고 아름답게, 붉게, 장미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찬찬히 기지개를 켜며 겨우내 얼어있던 잎들을 한 잎씩 조심스럽게 다시 깨웠다. 그중 몇 잎은 특히나 추웠던 지난겨울의 바람을 버텨내지 못했는지, 이미 바싹 마른 채로 똑 떨어져 버렸다. 겨울 동안 몇 번이나 안부를 물었지만 몇몇 잎들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나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매년 거쳐야 하는 작별인사임에도, 결코 그 사실이나 반복성이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진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들을 데리고 저만치 날아간다. 너무나 가볍게 날려가는 모습에 내 마음이 무겁다.


‘그동안 고마웠어. 모두가 꽃송이만을 볼 때 너희들은 묵묵히 이 땅에 나와 함께 오도카니 서서 햇빛을 받아줬지. 그러니 이젠 나를 대신해서라도 부디 최대한 멀리 날아가도록 해. 자동차 같은 것에 밟히기보단 바람에 날리고 날리다 아름답게 바스러지길…’


내 주변의 장미들도 하나 둘 분주하게 잎들을 깨우는 작업을 시작한다. 우리는 어느 공원의 바깥쪽 돌담 외벽에 심어져 살아가고 있다. 바로 옆에는 인도가 꽤 널찍이 나있어서 꽃을 피우기만 하면 봐줄 사람들이 꽤 많이 지나다닌 다는 것이 다행이다. 아마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색깔과 다양한 종의 장미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나와 우리의 「빨강」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다른 색의 장미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의 빨강이 장미를 대표하기에 한 색의 붉음도 모자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 않는가. 그것은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믿음이다. 나는 붉게 피어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 그 믿음이 5년 전 지독한 가뭄 때 나의 원동력이었고, 3년 전 거친 태풍 속 나의 버팀목이었다.


이제 양분을 모으기 시작해야 한다. 아직 나의 모든 뿌리와 모든 줄기의 끝까지 내 힘이 닿지는 않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기력을 다 차릴 때까진 그만큼 힘을 잘 분배해서 쓰면 된다. 지난 아홉 번의 봄을 허투루 보낸 것이 아니지, 나는 베테랑이다. 봄에는 햇빛보다 수분 섭취가 우선이다. 얼어붙은 겨울을 버티느라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은 유혹이 크지만, 그보다 우선은 겨우내 바스러지도록 메말랐던 몸에 수분을 전달하는 것이다. 기껏 겨울을 잘 버텨놓고 봄에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가뭄이라도 만나 말라죽게 된다면 그야말로 허무한 개죽음이 아닐 수 없다. 말했다시피, 이번 봄은 나의 무려 열 번째 봄이다. 나의 뿌리가, 나의 줄기가, 확실히 여덟 번째 봄만도, 심지어 작년 같지만도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겁도 없고 어리석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다행히 체력도 넘쳐나서 쌩쌩한 뿌리로 수분을 쑥쑥 흡수하고 동시에 무수히 많은 잎으로 봄 햇살을 쫙쫙 빨아들이는 게 가능했었다. 젊다는 것, 어리다는 것은 아마도 조금 덜 조심스러워도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시작부터 잎은 우수수 떨어져 버렸고, 뿌리 몇 가닥은 솔직히 아직 아무런 감각도 없다.


태양은 맹렬히 엔진을 돌리고 시간은 액셀을 밟아 어느덧 5월이다. 이제 지난겨울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햇빛이 뜨거워지고 있다. 이번 여름은 장마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다시 한번 꽃을 피울 준비가 되었다. 말년에 이제 와서 장마가 무섭진 않다. 오히려 비에 젖으면 나의 붉은색은 더 선명해질 것이고 내 향은 더 짙어질 것이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동안 무뎌진 가시를 다시금 날카롭게 내세우기 시작한다.


날은 조금씩 이르게 밝아지고, 밤은 조금씩 더디게 어두워진다. 여름이 도래했다. 나, 드디어 다시 한번 장미의 꽃을 피울 때가 되었다. 많은 이가 「장미」와 「장미꽃」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난 서운하지 않다. 묵묵히 꽃받침 쪽에 단단하게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이제 마지막 스퍼트다. 크고 색깔 짙은 꽃잎을 겹겹이 피워내려면 그동안 비축해 둔 체력을 꽃받침을 통해 다 쏟아내야 한다. 두 눈을 꼭 감고 정신을 집중하여 일곱 개의 꽃받침에 내 모든 기를 분출하고 있다. 열 번의 낮과 열 번의 밤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기어이 피워냈다. 정확히 일곱 송이의 장미꽃을 붉디붉게 피워냈다. 나로서도 감격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잘 피었다.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내 인생의 마지막 역작을 이제는 그저 내세울 뿐이다.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나의 모든 붉음을 다 할 것이다.


나에게 어린 왕자와 그의 장미같이 동화 같은 인연은 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내가 피어난 곳을 직접 찾아와 주었다. 그거면 됐다. 사람들이 내 앞에 멈추어 선채 이쁘다고 해주었다. 그리고 피어난 이 꽃을 제대로 마주하고, 내가 자라도록 지탱해 준 흙을, 이 꼿꼿하면서도 활처럼 유연한 줄기를, 내 잎과, 가시와,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봐주었다. 이들은 나를 보기 위해서 일 년을 기다려주었다. 사진도 몇 장이나 찍혔는지 모른다. 어떤 한 젊은 화가는 일주일을 꼬박 매일 같은 시간 늦은 밤에 찾아와 내 앞에 앉아 나의 이곳저곳을 그려주었다. 좋아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줄기를 자르고 가시를 손질하고 잎을 떼어내 버린 뒤 다른 꽃들과 뒤섞어 종이와 플라스틱 포장지에 싸버리는 게 아니고 말이다. 꽃을 좋아한다면서 그것을 갖기 위해 기어이 꺾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가.


그러고 보면 온실 속의 그 꽃들과 나와의 차이는 겨울이었다. 내가 꺾이지 않고 가시를 세우고 이렇게 당당하게 서서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겐 없었던 결핍이 나에겐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꼭 호전적인 것들만이 나에게 도움이 됐다고 할 수는 없다. 고통도, 시련도, 기쁨과 행복만큼이나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일조했겠지. 어쩌면 훨씬 더. 실제로는 어떤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는 쉽사리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들은 결과적으로 내가 자라지 못하는 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만하면 된 것 같다. 가을아, 나 그만하련다. 나뭇잎들이 낙엽 되어 떨어지기 전에, 난 그전에 가련다. 더 있으려면 더 있겠으나, 나의 제일 이쁜 모습이 내 가장 마지막 모습이길 난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아직 미약하다며 머쓱한 듯이 노랗던 봄의 햇살, 추운 새벽에 파랗게 번지며 포근히 덮어주었던 안개, 상냥하게 어루 만주어 줬던 바람의 손길, 몇 번이고 찾아주었던 노란색과 파란색 나비들, 그 모든 과정이, 그 모든 계절이, 그 모든 인연이, 이 세상이, 나라는 장미였구나. 좋든 말든, 지금의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나이니까.


그러니 겨울도 나에게서 걷어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나는 온실 속의 그 꽃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나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의 장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나이려면, 그 무엇도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 부족했던 것들도 덜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고통은 고통스럽고 아픔은 아프며 시련은 시리다. 하지만 주어지지 않는 것들 또한 다른 의미로는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장장 십 년을 살았다. 열 번의 봄, 열 번의 여름, 그렇게 열 번 꽃을 피웠다. 온실 속 꽃들에게는 그 어떤 결핍도 없었고 나에겐 겨울이라는 결핍이 주어졌다. 그것이 나의 가치의 원천이다.


망치의 결단 없이는 못을 박을 수 없듯이

망치도 피차 아픈 것을,

못이 망치를 원망하는 것보다 우스운 게 또 있을까


겨울 없이 나는 그 무엇 하나도 나일 수가 없는데

추워도 겨울 자신이 제일 추울 것을,

겨울을 원망하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장미였던가


나는 그렇게나 내가 겨울을 이겨내고 활짝 피어난 장미인 것에 긍지를 가졌으면서, 평생 동안 겨울을 적대시하는 누를 범했다. 내가 아름다운 이유가 겨울을 이겨냈기 때문이라면, 겨울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아름답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왜 나는 몰랐을까.


그렇다면 겨울, 너는 나의 자랑이구나. 그렇다면 겨울, 너는 그 누구보다도 나라는 장미 그 자체였구나.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난 겨울에게만 참 모질었었다. 그 역시 장미였을 뿐인데. 겨울의 끝은 가을의 처음과 정말 많이 닮아있다. 계절의 구분은 그렇게나 모호하고 경계선은 이렇게나 흐릿한데, 나는 그걸 굳이, 굳이, 갈라서 차별을 했나. 어차피 돌고 돌아서 또 돌아오는 것들에게 그 구분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이제 와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많이 붉혀졌지만 내 붉은 꽃에 가려지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니 가을아, 전해다오 겨울에게. 나는 평생 장미의 길을 걸어왔고, 돌아보니 내 길이, 그 자체가 곧 장미였다고. 그러니 겨울, 당신 또한 장미였다고.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서 내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고 전해다오. 덕분에 나는 훌륭한 장미로서 살 수 있었고, 우리는 함께 이쁜 꽃을 열 번이나 붉게 피워냈다고. 그리고 꼭 제대로 알려다오. 겨울은 한 번도 내 꽃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까, 우리가 함께 피운 꽃이 얼마나 어여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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