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fencers! 알파벳 획 끝을 마치 칼끝처럼 멋들어지게 흘려 쓴 현수막이 피스트와 나란하게 내걸렸다. 전광판에도 같은 문구가 번쩍였다. 관중석 곳곳에는 ####펜싱클럽, @@@펜싱클럽, $$펜싱클럽 같은 클럽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 클럽 소속의 수많은 우리들, 펜서들은 흰 도복을 갖춰 입은 채 각자의 방식대로 몸을 풀었다. 2017년 11월 26일, 이른 오전 서울 올림픽공원 SK핸드볼 경기장 한켠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던 초보 펜서는 입이 바짝 말라 들어갔다.
검을 손에 쥔 지 4개월여 만에 첫 대회에 출전했다. 서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제5회 대한펜싱협회장배 전국 남·녀 클럽·동호인 펜싱선수권대회 였다. 대한펜싱협회는 2014년부터 전국의 동호인 펜서들을 대상으로 한 전국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그해 1월 대한펜싱협회는 “펜싱 저변 확대 및 유망주 발굴”이라는 목적으로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첫 대회를 열었다. 같은 해 11월에 2회 대회까지 개최했는데, 장소는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으로 옮겨갔다. 이후부터는 매년 11월 핸드볼경기장을 대회장으로 해서 한 차례 여는 것으로 고정됐다.
왜 하필 핸드볼경기장이야? 하는 의아함이 있을 순 있는데, 핸드볼경기장은 원래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펜싱경기장으로 만들어졌다. 펜싱은 그때도 우리나라에선 ‘비인기 종목’이었던 탓에 여러 비인기 종목과 함께 경기장을 함께 썼다. 핸드볼도 그 더부살이 가족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쩌다 더부살이하던 객(客)이 주인 자리를 꿰차게 됐을까? 스포츠에 다른 이유가 있겠나? 그해 여름 핸드볼이 우리 국민을 들썩이게 만든 것이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해 여자 핸드볼팀은 우리나라 올림픽 역사상 첫 구기 종목 금메달의 쾌거를 이뤘다. 그 덕에 펜싱은 전용경기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같은 해 11월에 곧장 펜싱경기장에서 핸드볼실업대회와 체육부장관기 전국국교핸드볼대회가 동시에 열렸다. 핸드볼협회는 이 기회에 펜싱경기장을 핸드볼전용경기장으로 확보해보자는 계획도 조심스레 내놨다. 그런 역사적 맥락 때문인지, 핸드볼전용경기장 건립 논의는 수십 년을 이어오다가 2011년 SK그룹이 이곳을 리모델링해 핸드볼경기장으로 탈바꿈시켜버렸다.
SK그룹은 우리나라 비인기 스포츠의 든든한 후원자다. 2003년부터 펜싱을 후원했고, 2008년부터는 핸드볼도 후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런 배경도 펜싱경기장이 핸드볼경기장으로 탈바꿈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양 협회의 회장을 그룹 계열사 오너들이 맡고 있으니 큰 잡음 없이 변경 작업이 이뤄진 것이다.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핸드볼경기장은 그 규모에서부터 초보 펜서들의 기를 죽이기 안성맞춤이다. 결승 피스트를 포함해 14미터짜리 피스트만 13개 설치된다. 아무리 초보라도 그 피스트 위로 흐르는 낯선 경쟁자 100여 명의 흥분과 긴장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곳곳에선 TV에서나 보던 펜싱 스타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대회 기간 중에 사인회를 가졌고, 동호인 선수 1명과 이벤트 경기도 뛰었다.
만 4개월을 넘겨 5개월 차에 겨우 접어든 새내기 펜서가 무슨 대회냐 싶을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무렵의 나는 인어공주라는 정체를 확인하고, 스스로 저질 체력에 좌절하는 중이었다. 클럽에서 연습 시합을 하는 것에도 두려움을 느꼈다. 기술적으로도 기본기를 겨우 익힌 상태였다. 스승님의 구호에 따라 연습을 할 땐 겨우 흉내라도 낼 수 있던 마르셰 팡트는 시합에만 나서면 엉거주춤하게 똥 마려운 강아지 꼴이 됐다.
똥 마려운 강아지 주제에 대회를 나간다는 건 시간 낭비고, 돈 낭비라고 생각했다. 동호인 대회라고 해도 전국대회를 나가려고 하면 어느 정도 ‘급’은 갖추고 나가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생각도 했다. 더구나 당시에 나는 장비도 모두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5개월 차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내가 이 운동을 얼마나 이어갈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달 만에 겨우 칼 한 자루를 구입하고, 넉 달 만에 펜싱화와 장갑까지 야금야금 갖춘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우리 클럽 탄생과 함께 펜싱을 해온 터줏대감 I는 자신도 3, 4개월 만에 대회에 나갔다며 내 용기를 북돋웠다. 도복이 없다는 핑계도 대봤지만, 운동을 쉬고 있는 다른 동료 덕분에 쉽게 해결되어버려 머쓱해졌다. 그럼에도 마음 저 한구석에 ‘나 같은 게 무슨 대회?’라는 저어함이 남았다. 그때 검독수리 D의 한마디가 대회에 나가보자는 마음을 굳히게 했다. “SK배(펜싱협회장배)는 참가비 없어요.” 공짜! SK라는 든든한 후원사를 둔 덕분인지 펜싱협회장배는 3~5만 원씩 참가비를 받는 다른 대회와 달리 참가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동호인들도 대한펜싱협회장배라는 공식 명칭보다 ‘SK배’라고 대회를 부른다. 아무튼,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똥 마려운 강아지인들 못 나갈 이유는 없었다. 때마침 기자협회에서 하는 교육이 대회 이틀 전 금요일, 서울에서 예정됐다. 말 그대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였다.
대한펜싱협회장배는 나 같은 초보들이 같은 생각으로 참여를 망설이지 않아서인지 대회 규모도 가장 큰 수준이다. 그해에만 남녀 일반부 플뢰레 참가 신청자는 138명으로 모든 종목 중 가장 많았다. 남여 각각 79명, 49명이었고, 마찬가지로 다른 남녀 종목에 비해서도 가장 많은 수다. 플뢰레는 매년 참가 신청자가 늘어서 2019년엔 남자 일반부만 99명에 달했다
“#대한펜싱협회장배 첫날, TV서 보던 분들 많이 옴. 나는 내일 출전. 성인 #플뢰레 출전 선수 79명. 젤 많음. 한 번만 이기면 좋겠음. #펜싱스타그램 #펜싱 #fencing #wearefencers 슬로건인가 봄.” 출전을 하루 앞두고 열린 초·중등부 대회를 구경한 후 인스타그램에 쓴 각오는 소박했다. 예선전 1승.
시작은 미약해도 그 끝은 창대하리라고 하던데, 개인적으론 창대한 끝도 바라지 않는다. 펜서로서 개인 목표는 가장 규모가 큰 대한펜싱협회장배 8강전 진출이다. 매우 냉정한 자기객관화를 통해 마련한 목표다. 몇 차례의 대회 출전을 통해 경험한 잠재 경쟁자들의 실력을 감안하면 8강전 진출도 쉽지 않은 목표라는 걸 안다. 따지면 상향 지원을 하는 셈인데 8강전 진출자까지 상장을 준다는 게 목표 설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칼을 빼 들었으니 무라도 베어야 할 텐데, 내겐 그 ‘무’가 8강전 진출자에게 주어지는 상장이다.
아, 그래서 첫 대회 성적은? 예선전 전패. 광탈. 72명(7명 불참) 중 68등.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