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싫은 당신에게 #운문 에세이
삶은 파도를 한 번 넘으면
더 큰 파도를 몰고 와서는
이것도 넘어볼 테냐 하고
물음을 던지는 듯했다
파도가 높을 때면 더 과감하게
험할 때면 더 유려하게
삶은 결코 단조롭지도
내게 단조로움을 허락치도 않았다
휘몰아치는 마디에
숨 가쁘게 따라오는 애달픈 웅장함
2022.03.20
실로 오래간만에 글을 쓴다. 회사 일이 바빴다. 이별도 했다. 사실 두 번째 이유가 살짝 더 크다. 슬픔에 빠졌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에, 며칠 동안은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휴대폰만 조금 만지작 거리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볼레로라는 연주곡이 있다. 원래는 스페인의 춤곡이지만, 우리에게는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곡으로 더 유명하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로 선정된 적도 있다. 물론 나는 이 곡을 중학생 때까지 디지몬 극장판 OST로 알고 있었다.
이 곡의 특징은 멜로디가 매우 단순하다는 점이다. 메인 멜로디만 놓고 보면 악보 기준으로 몇 마디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단일 멜로디 한 줄로 시작하지만, 하나씩 악기가 추가되고 변주되면서, 작은 물장구로 시작한 음악은 나중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파도가 된다.
나는 이 곡의 작곡가에 대해서도, 이 곡의 주제에 대해서도 모른다. 다만 들으면서 느낀 것은, 삶이 인간에게 던지는 고난과 역경을 음으로 표현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작고 간단하고, 해결하기 쉬운 문제를 냈다면, 수학 문제에 수식을 추가하듯 점점 하나씩 조건을 더하여, 이것도 풀 수 있겠나 하고 짓궂게 묻는 느낌이 든다. 음악처럼, 살면서 간단하고 단조로운 삶은 얼마 가지 않는다. 인생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지루하고 평온한 상태로 가만히 두지 않는다. 심지어 문제의 난이도는 점점 어려워진다. 그럴 때면 종교가 없음에도 누군가가 일부러 이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것은 비단 곡의 청자가 아닌, 음표의 입장에서도 상황이 유사하다. 처음에는 단 하나의 멜로디로 출발하지만, 하나씩 추가되는 악기에, 나중에는 헉헉거리며 악보를 달리는 음표가 떠오른다. 그런 음표를 떠올리면 무언가 안쓰럽고 애달프다. 악보에 음표가 추가되고, 음표가 헉헉거릴수록, 역설적이게도 음악은 더욱 다채로워진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삶은 우리에게 언제나 문제를 던져주지만, 문제를 해결할수록 인간은 성장하고 그 삶은 조금 더 다채로워진다. 더구나 사람의 뇌는 '잊기'에 최적화되어있기에, 힘든 순간은 금방 잊고, 아무리 힘들었던 순간이라 할지라도 '살기 위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기억을 윤색하고 미화한다. 힘든 기억은 떠올릴수록 힘들기만 하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은 되지 않는 탓이다.
계속해서 나이를 먹다가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더 이상 고난과 위기가 없는 순간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고작 지난 몇 주간의 기억으로 미루어보아도, 그런 순간은 아마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어떤 문제 앞에 놓일 것이다. 다만 그것을 해결하고 위기를 넘기며 조금이나마 성장하고, 조금이나마 이 삶이 좀 더 흥미로워지길 바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