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띠. 어릴 적 나의 별명이다. '뚱땡이'보다 조금 더 친근하고 귀여운 느낌이지만, 역시 유쾌한 별명은 아니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나는 뚱뚱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신체검사에서 '비만' 판정(?)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어릴 때 한약을 잘못 먹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꼭 한약 때문만은 아니었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먹고사는 일과 무한정 반복되는 가사노동 그리고 아이 둘을 건사하느라 늘 바빴다. 차분히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자분자분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덩그러니 있을 때면, 심심하고 외로워 더욱더 먹는 걸 탐했다. 냉장고와 부엌 찬장을 뒤져 먹을 걸 찾아내고, 부지런히 손과 입을 움직여 음식을 씹고 소화하며, 고프지도 않은 배를 채우고 또 채웠다. 외로움이 배고픔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내가 살이 쪘던 이유를 무조건 바쁜 부모님으로 인한 외로움 탓으로 돌리기엔 조금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당시에 맞벌이를 하는 가정이 우리 집 말고도 많았는데, 왜 다른 집 아이들은 모두 나처럼 뚱뚱해지지 않았을까. 어떻게 평균 체중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사실 나는 외롭기도 했지만, 유난히 먹는 걸 좋아했다. 음식이 눈앞에 있으면 끝이 보일 때까지 먹었다. 그게 순전히 외로움 때문이었다고 말하기엔 양심에 걸린다. 유년 시절 나의 최애 식품은 삼겹살. 두꺼운 생삼겹이 아닌 얇게 썬 냉동 삼겹살을 노릇하게 바싹 익혀 기름장(참기름과 소금, 후추 쓰리콤보)에 톡톡 찍어서 반찬처럼 밥 위에 김치와 함께 올려 먹는 걸 좋아했다. 상추에 싸서 먹을 때도 꼭 고기와 밥을 함께 넣어 먹었다. 입을 크게 벌려 주먹만 한 쌈을 욱여넣고, 오물오물 우걱우걱 야무지게 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물론 밥만 잘 먹었던 건 아니다. 과자도 늘 달고 살았다. 통밀로 만들어져 어쩐지 건강에 좋을 것 같지만 실은 칼로리 폭탄인 빨간색 포장비닐에 둘러싸인 '다이제'를 앉은자리에서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먹었다(참고로 '다이제' 1통의 칼로리는 밥 3 공기와 맞먹는다). '참크래커'같은 심심한 과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본능처럼 마요네즈를 크래커 위에 발라 먹으면 맛있다는 걸 알았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마요네즈를 바른 '참크래커'를 건네니 신세계를 만난 듯 놀라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에 종합과자 선물세트를 받으면, 하루 종일 만화영화를 보며 도장깨기 하듯 과자와 초콜릿, 사탕을 차례대로 먹어치웠다.
요즘은 마요네즈뿐 아니라 치즈까지 올려 먹는다.
비만에 최적인 취미생활도 갖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책 읽기다. 갑자기 책에 덤터기를 씌우는 것 같지만, 정말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고, 얼음땡을 하며 뛰어노는 것도 물론 좋아했지만,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오락은 집에서 배를 깔고 누워 귤이나 과자를 먹으며 만화책과 소설을 읽는 거였다.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된 건 전적으로 아빠 때문이다. 아빠는 한 달에 한 번씩, 마치 월급봉투를 건네는 사람처럼, 누런 서류봉투에 어린이 만화잡지 '보물섬'을 넣어 내게 주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책 읽기 덕후의 삶이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청계천 헌책방에 갔다. 동네 서점이나 교보문고에서 매번 정가를 주고 새책을 사 주는 일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내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엔 마을에서 공공도서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동네마다 헌책방이 있어 다행이었는데, 작은 동네 헌책방에서 보유한 얼마 되지 않는 책으론 긴긴 방학을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굳이 버스를 타고 청계천까지 출동했던 것이다. 헌책방에서 고른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노끈으로 묶고, 엄마와 나눠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힘들었지만 설레고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엄마는 말했다. "빨리 읽지 마. 아껴서 읽어."
교과서보다 소설책을 많이 봐서 성적표엔 늘 양가미가 가득했지만, 대책 없이 행복했던 시절. 부모님이 나를 입히고 먹여서 키운 것처럼 책도 나를 키웠다. 그러나 마음만 키운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주야장천 먹고, 누워서 책을 보니 외형은 점차 '통통'에서 '뚱뚱'으로 변해갔고, 급기야 고도비만이 되었다. 72. 고1 신체검사 때 측정된 나의 몸무게다. 154cm의 작은 키엔 건강상에도, 외견상에도 과한 무게였다. 보세 가게에서 파는 옷이 몸에 맞지 않아, 새 옷을 사려면 동대문이나 남대문에 있는 빅사이즈 가게에 가야 했다. 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갈 때 반티를 맞춰 입었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가슴팍에 핑크 판다(핑크 팬서)가 새겨진 '쫄티'를 입었다. 나 역시 분홍 표범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지만, 내가 입은 건 '쫄티'가 아닌 '박스티'였다.
그쯤 되면 살을 빼겠다 결심할 만도 했을 텐데, 난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결단력 있는 인간은 못 된다. 빅사이즈 가게에서 옷을 사고, 수학여행 때 혼자만 박스티셔츠를 입었음에도 창피해하거나 크게 속상해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삼총사로 다니던 친구들 모두 170cm를 넘는 장신이었는데, 늘씬한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뚱뚱한 나를 질책하고 당장 어떻게 바꿔보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어째서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도 엄마의 주입식 교육(?) 탓이 큰 것 같다. 엄마는 단 한 번도 살이 쪘다고 타박하거나,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대신 빅사이즈 옷가게에 데리고 가 옷을 사 주고, 매일 과식을 부르는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고, 읽고 싶다는 책을 사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대학생이 되면 다 빠져.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너무나 확신에 차서 말했기 때문에, 나는 진짜 그 말을 믿었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엄마는 나와 다르게 늘 날씬했다. 군것질도 좋아하지 않았다. TV에 방실이 씨가 나오면 복스럽다며 좋아했다. 애초에 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니. 참으로 순진했다.
그러던 중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라 할만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친한 친구 J가 내게 물었다.
"너 진짜 네 모습이 궁금하지 않아?"
"진짜 내 모습?"
"원래 너는 이렇게 뚱뚱한 모습이 아닐 거 아냐. 나는 궁금해. 네가 원래 어떤 모습일지."
J는 자기가 도와줄 테니 살을 빼 보라고 꼬드겼다. 나는 '이참에 기필코 살을 빼야지' 하는 굳은 결심 따윈 당연히 하지 않았지만, '그래? 그럼 한번 해 볼까'하는 지극히 가벼운 마음으로 알겠다고 했다. J가 제안한 다이어트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먹고 걷기. 그게 전부였다.
다이어트 선언(?)이 있고 첫 번째로 맞이한 토요일 오후, 우리는 하교 후 이대입구에서 만나 KFC에 갔다(당시엔 토요일에도 학교에 갔다. J와 난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햄버거와 치킨, 감자튀김, 콘샐러드, 비스킷을 골고루 먹으며 빵빵하게 배를 채웠다. 그리고 집까지 걸어갔다. 이대입구에서 북가좌동 집까지는 도보로 1시간 정도 걸렸는데, J와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 얘기부터 짝사랑하던 남자애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1시간이 마치 10분처럼 짧게 느껴졌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렇게 오래 걸어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걷는 게 생각보다 재밌었다. 조금씩 걷는 날을 늘려, 어느 날은 홍대에서 집까지, 또 어느 날은 신촌에서 집까지 틈만 나면 걷고 또 걸었다. 처음엔 J와 둘만 걸었지만, 곧 다른 친구들도 합세해 다섯 명(중학교 1학년 때 결성된 5총사)이 함께 걸었다.
걷기 시작한 뒤로 매주 한 번씩 몸무게를 재기 위해 동네 목욕탕에 갔다. 초반 한두 달은 몸무게에 변화가 없었지만, 서너 달쯤 지나자 드디어 변화가 나타났다. 7자로 시작하던 몸무게 앞자리가 어느 날 6자로 바뀌더니, 1년이 지나자 5자가 되었다. 단시간에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천천히, 조금씩 일어난 변화여서 그런지, 초반에는 나의 변화를 눈치챈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긴 공백인 겨울방학이 끝난 뒤 학교에 갔을 땐 거의 모든 사람이 내 변화를 알게 되었다. 개학 날 등굣길에 같은 반 친구들이 앞에서 걸어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우르르 내 자리에 몰려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흥분해서 물었다. 다른 반 아이들은 나를 동물원 원숭이 바라보듯 창문에 서서 구경했다. 그리고 이상한 소문도 돌았다. 뚱띠가 방학 동안 일본에 가서 지방 절제술을 받았대, 약을 먹었대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가짜 뉴스들이 돌았다. 그리고 급기야 담임은 교무실로 나를 호출해 건강 문제가 의심되니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살이 좀 빠졌을 뿐인데 모두 호들갑을 떨었다. 난생처음 내가 속한 집단에서 주목이란 걸 받았다. 얼떨떨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뭔가 전에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대망의 신체검사날. 1990년대 학교에는 학생 인권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50여 명의 십 대 소녀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순서대로 체중을 측정당하고, 반장이 큰 소리로 체중계에 찍힌 숫자를 외치면, 교사나 누군가가 생활기록부에 무게를 적었다. 그때 이름으로 나를 불렀는지, 번호로 불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체중계 위에 올라섰을 때 반장이 크게 외치던 두 자리 숫자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52"
선생님은 작년 체중과 비교하더니, 뭔가 이상하다며 다시 재 보라고 했다. 한 번 더 체중계 위에 올라갔지만, 바늘은 여전히 52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기나긴 나의 비만 시대가 일단락되었다.
에필로그
올해 마흔세 살인 나는 다시 비만이 되었다. 물론 앞자리가 7은 아니지만, 작년에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비만 판정을 받았다. 죽기 전에 다시 52가 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요즘은 물만 마셔도 살이 찌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타도 몸무게에 변화가 없다. 예전처럼 걷는다고 무조건 살이 빠지는 나이가 아닌 것이다. 실현 가능한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 일단 과체중이 되어 보자. 다음 건강검진에서 비만이 아닌 과체중 구간에 진입하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다.
다시 친구들과 함께 그 길을 걸을 수 없지만, 그 시절 우리가 열광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동네를 걸어야겠다.
단지 그것뿐인가 그대가 바라는 그것은.
아무도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 둘 셋 lets go!
그대는 새로워야 한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자
- 서태지와 아이들 <환상 속의 그대> 중
덧붙이는 말: 이 글의 조회수가 10,000을 넘었네요. 읽어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