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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현감으로 부임하였던 이들의 간찰

by 수근수근

평택문화원 소장사료로 본 평택이야기

평택현감으로 부임하였던 이들의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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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택현은 전국 330여 군현 가운데 규모가 작은 현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 팽성읍 지역이 곧 조선시대 평택현 지역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평택현을 통치하기위해서 조정에서 종6품 현감을 내려 보냈으며, 이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팽성지, 외임안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평택문화원에서는 평택현감을 지냈던 이들 중 이홍유·김두열·이해선·한치조·유정식의 간찰을 보관하고 있다.

효종6년(1655년) 평택현감에 제수된 이홍유는 효종10년(1659년) 어사의 의해 파면되었으며, 근묵에도 소개가 된 서예가 김두열은 정조3년(1779년)에 제수되었다. 이해선은 순조33년(1833년)부터 헌종1년(1835년)까지 한치조는 철종13년(1863년)부터 고종2년(1865년)까지 평택현감을 역임하였다. 유정식의 경우 고종대에 평택·직산 등에 부임하여 고을을 다스릴 당시 청렴하여 관아의 서리들은 그를 두려워하였으며 고을 백성들은 그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암행어사로 나온 관찰사에 의하여 조정에 보고되었으며, 그 후 관직이 병조좌랑까지 올랐다.

평택으로 부임한 관리 중에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도 있었다. 정조15년(1791년) 부임한 이승훈은 지방수령이 부임하면 3일 이내에 문묘에 배향을 해야 하는데, 이승훈은 이와 같은 의례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생들이 간청했어도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결국 문제를 제기한 유생들은 무고죄로 벌을 받았고 이후 오랫동안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이 사건을 ‘평택현감 이승훈의 성묘 불배 사건’이라 한다.

이처럼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들이 직접 선정비가 세워지는 등 칭송을 받았던 현감이 있는 반면, 악행을 저질러 파면되는 현감도 있었다. 지역민들과 함께 살아가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통치를 했던 현감에 누가 부임을 하느냐는 그 지역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 글은 2015년도 지역신문에 연재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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