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때던가, 여름방학을 맞아 다니게 된 미술학원에서였다. 나무로 된 공 모양의 커다란 원구를 크레파스로 그리는 정물화 수업이 있었는데, 나는 내 그림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린 감각에도 내가 욕망하는 형상과 스케치북에 그려지고 있는 내 그림이 너무 달랐던 모양이다. 크레파스라서 이미 그어진 선과 색은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새로 그리기 위해 그리다 만 스케치북 종이를 넘기려 했다. 그때 원장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다.
질문이 뭐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으셨던 것 같다. 묻는 음성과 태도가 다정하고 따스했던 것은 정확히 기억난다.
나는 잘못 그렸다고, 새로 그릴 거라고 답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 곁에 앉더니 내 그림 위에 그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선 저 선, 이 색깔 저 색깔, 크레파스들이 내 그림 위에 슥슥 문질러지더니 근사한 원구 하나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대강의 틀을 잡아놓고는 내가 마저 완성하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림을 완성했다.
내가 잘못 그렸다고 생각했던, 처음의 선들과 색깔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흉터가 아니라 새롭게 탄생한 원구의 일부로서, 그 원구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개성으로서 남아 있었다.
그림 by 목혜원
즉흥 연주를 요체로 하는 재즈에서 궁극적으로 틀린 음이나 틀린 박자란 없는 것 같다. 틀렸다고 생각한 그 음과 박자는 단지 다음에 올 음과 박자를 기다릴 뿐이다. 뒤이어 탄생하는 음과 박자와 함께, 연주가 끝나면 당당히 전체의 일부로서, 그 연주의 개성으로서 존재하게 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작곡가 데이빗 암람David Amram의 증언에 따르면, 재즈에 틀린 음이나 틀린 박자란 없다는 이 말은 전설의 재즈 트러펫터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가 실제로 했던 말이기도 하다(애쉴리 칸Ashley Kahn의 책 'Kind of Blue' 27p에 실린 데이빗 암람 인터뷰에서). 또,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Herbie Hancock 역시 90년대 중반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MBC 라디오 방송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비슷한 맥락의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한창 재즈에 미쳐 있던 사춘기 소년이었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흥미롭게 방송을 들었다. 그 내용을 되살려 보면 다음과 같다.
허비 행콕이 마일즈 데이비스와 연주 여행을 다니던 어느 날, 함께 밴드에 있던 테너 색서포니스트 죠지 콜맨George Colman이 호텔 방에서 연주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일즈 데이비스는 죠지 콜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임마, 연습은 무대 위에서 하는 거야.”
마일즈 데이비스의 농담 섞인 이 반응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 재즈에 연습따위는 필요 없다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저 말에는 연습을 거듭해서 한 치의 틀린 바 없이 미리 준비된 그대로 완벽하게 무대에서 연주를 펼쳐 보이는 것은 재즈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는, 재즈에 대한 그의 지론이 담겨 있다.
다시 원구 그림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서, 열 살 소년이 그린 그 그림은 당연히도 이 세계에 전혀 중요한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그림을 완성한 그 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히 내 삶에 남아 있다.
가끔 나는 그날 그림을 완성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크레파스가 아닌 살아서 숨 쉬는 것으로 지금도 그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작품의 장르는 정물화가 아니라 아주 긴 세월의 행위 예술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재즈가 그 그림의 진짜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리즈는 바로 그런 재즈에 첫귀에 반해 재즈를 좀 더 알고 싶어하는 이들, 혹은 재즈에 첫귀에 반해 보고싶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
매혹적이고 개성 있는 재즈 곡과 그 곡이 담긴 앨범을 시대 순으로 소개하며, 그 곡에 대한 나의 감상과 느낌, 그리고 재즈의 역사와 재즈 뮤지션들에 관한이야기와 더불어, 소개하는 곡으로부터 연상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랑과 예술과 사회와 인간에 대한 자유로운 사색들을 풀어놓고자 한다.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
내가 재즈에 첫귀에 반했던 90년대에는 라디오 재즈 방송이나 직접 음반 가게에서 구매한 CD가 아니면 재즈를 들을 수 없었다. 용돈을 아껴 한두 달에 한 장씩 재즈 CD를 사 모으는 청소년으로 자라난 나는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주는 어떤 재즈 곡에 첫귀에 반하기라도 하면, 그 곡이 들어 있는 CD를 살 때까지 심하게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첫눈에 반한 상대를 다시 볼 수 있게 될 때까지 맘속으로 애달프게 그리워하는 것마냥 첫귀에 반한 그 곡이 수시로 귓가와 머릿속, 아니 온몸을 맴돌아 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CD를 사서 그 곡을 듣고 있을 때에는, 너무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은 것마냥, 듣고 있는데도 그 곡이 듣고 싶은 이상한 증세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요즘에는 음악을 두고 불필요한 가슴앓이를 할 일은 없어서 좋다. 아름다운 음악조차 너무 흔해졌다는 사실에, 어쩌면 너무 흔해져서 옛 시절만큼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음미하고 추앙할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가슴 한 구석이 헛헛해지고 조금 슬퍼지기도 하지만, 좋은 것에 쉽게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좋은 것을 쉽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재즈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좋은 것이리라 믿어 본다.
좋은 것을 더 쉽게 잘 나누기 위해서, 이 시리즈에서 소개하는 재즈 곡과 그 곡이 수록된 앨범의 유튜브Youtube 웹주소 링크, 그리고 스포티파이Spotify QR코드를 매 챕터마다 맨 앞에 걸어 두었다.
내게 재즈는 오랜 학습과 숙련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음악도 아니지만 그저 분위기를 잡거나 띄우기 위한 BGM도 아니다. 내게 재즈는 모종의 축제다. 일상으로 스며든 축제.
빌 에반스Bill Evans
때문에 재즈 이론이나 재즈 역사를 무미하게 기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꼭 들어봐야 할 아름다운 재즈 곡과 그 곡이 수록된 앨범을 시대순으로 소개하며, 재즈라는 축제의 장 한 가운데서 벅차오르는 흥을 독자들과 함께 느껴 보기도 하고, 축제 이곳저곳의 소소한 풍경들 앞에 쭈그려앉아 숨을 고르거나 하품을 하거나 뜬금없는 눈물 한줄기를 흘려 보기도 할 것이다.
축제의 배후지에 자리한 낯선 골목들을 함께 배회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축제 저편에서 결코 소소하지 않은 웅장한 풍경과 갑자기 마딱트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 때는 함께 턱을 탁 늘어트리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싶다.
재즈는 격정이고 환희이자, 쓸쓸함이며 감미로운 권태다. 재즈는 극한의 쾌감과 희열을 주기도 하지만 언제나 극락 같은 성공적이기만한 축제인 것은 아니다.
재즈는 왁자지껄 흥겨운 주말 축제에서 홀로 어슬렁거려야 하는 불청객 외톨이가 된 듯한 소외의 감정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슬렁거리는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조차 미묘하고 감미로운 향을 내뿜는다.
그래서 홀로 어슬렁거린 외로웠던 축제는 망한 주말이 아니라 또다른 추억이 된다.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추억이 된다.
재즈가 귓가에 흐르는 한 어제의 추억도, 지난 주말의 추억도, 오랜 옛날의 추억도 모두 지금 여기의 추억이 되고, 내일과 미래의 추억이 된다. 그렇게 일상은 축제가 되고 삶이라는 행위 예술이 되고, 재즈 그 자체가 된다. 열 살 소년이 미술학원서 그리던 그 원구 그림처럼.
여기서 소개하는 재즈 곡들과 앨범들이 이 시리즈를 읽는 이들의 일상을 때로는 극락과도 같은 희열로, 때로는 씁쓸하고도 달콤한 향으로 채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