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마주친 것인지, 어떤 이유가 있어 약속을 잡고 만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이 아주 오랜 시간 뒤에 만난 것은 분명하다. 많은 경우도 그러하듯 그들은 시절연인이었고 오래 전 어느 날 이별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그대로라고. 어떻게 지냈길래, 하나도 변함없다고. 미남인 것도 여전하다고.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서 두 사람이 오래전 이별한 까닭은 남자에게 다른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How did the romance come through? We haven’t met since then.
그 연애는 어찌 되었느냐고, 그 뒤로 우리는 만난 적이 없지 않느냐고 여자는 묻고 말한다. 문맥 상 여기서 그 연애가, 말하고 있는 여자 그리고 마주한 남자 간의 연애는 아닐 것이다.
여자는 두서없는 말들을 좀 더 잇다가, 용기를 낸다. 용기를 낸 것인지 미련 맞은 것인지, 여자는 나도 변한 것이 없다고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노래를 들으면 들을 수록 이 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독백처럼 들린다.
고백하는 그 소절은 두 번 반복된다. 그래서 더 독백처럼 들린다.
실제로는 끝내 입밖으로 내뱉아질 수 없는, 내뱉아져서는 안 될 가슴 한 켠의 진심이라서, 속으로만 한 번 더 되뇌는 것 같다. 무엇보다, 다른 사랑을 찾아서 여자를 과거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둔 채 떠난 남자에게 이런 고백은 가당치 않으니까.
여자에게 변함없는 것은 가슴 한 켠의 마음이고, 그 마음 때문에 여자의 눈에 남자는 여전히 미남으로 보인다.
여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두 번 천천히 되뇌고 마는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말하지 못 하는 그 마음, 그리움과 사랑의 이면에는 여전히 원망과 회한이 숨어 있으리라 상상한다. 독백으로조차 말해질 수 없는 한층 더 힘겨운 감정들이다. 사랑을 말하면, 숨어 있던 그 감정들마저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를까 여자는 두려울 것이다.
고백 같은 이 독백의 노래를 헬렌 메릴Helen Merrill은 깊고 그윽하고 청아한 허스키 보이스로 들려준다. 허스키하지만 청아하게 들리는 이 모순적인 음색은 그녀의 목소리가 가진 가장 매혹적인 특성이다. 미움과 미련이 교차하는 모순적인 사랑의 감정을 그녀가 담담히 이야기하듯 노래할 때, 이 특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What’s New?>가 바로 그런 노래다.
<What’s New?>는 1955년에 발매된 그녀의 데뷔 앨범 ‘Helen Merrill’에 담겨 있다.
헬렌 메릴은 비밥Bebop 재즈 시대부터 활약을 시작한 백인 여가수였다. 대규모로 편성된 빅밴드와 함께 대형 무대에 서기보다 4-6명의 연주자가 연주하는 작은 클럽 무대에서 공연하기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나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나 빌 에반스Bill Evans와 같은 비밥*모던재즈 시대의 음악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소개하는 곡 <What’s New?>가 수록된 앨범 ‘Helen Merrill’은 그들 중 트럼페터 클리포드 브라운과 함께 작업한 앨범이다.
<What’s New?> 중간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트럼펫 소리의 주인공도 당연히 클리포드 브라운이다. 헬렌 메릴의 독백 같은 담담한 창법과 대비되는 그의 격정적인 트럼펫 간주는 노래 속 화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독백조차 되지 못한 채 휘몰아치는, 부질없는 감정의 회오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클리포드 브라운과 헬렌 메릴
클리포드 브라운은 트럼페터로서, 비밥*모던 재즈 시대 초기의 트럼펫 연주에 있어 교과서적 인물이다. 특히 비밥이 하드밥Hard Bop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연주 스타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드밥에 대해서는 추후 15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안타깝게도 클리포드 브라운은 자신의 음악이 열어젖힌 하드밥의 물결을 제대로 타보지도 못 하고 1956년 빗길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클리포드 브라운의 나이 불과 스물여섯 살 때였다.
앨범 ‘Helen Merrill’의 프로듀싱을 맡은 이는 퀸시 존스Quincy Jones다. 그의 커리어는 재즈 씬에서 시작됐지만 서서히 활동영역이 팝Pop과 리듬앤블루스 쪽으로 옮겨졌고, 60-70년대에는 영화 음악감독로서 많은 유명 영화들에 참여하기도 했다. 참여작 중에는 '밤의 열기 속으로 The Heat of Night', '게타웨이Getaway' 등 지금은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들도 있다.
팝음악 프로듀서로서 퀸시 존스는 80년대에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앨범들을 프로듀싱하게 된다. 'Thriller'나 'Bad' 같은 마이클 잭슨의 걸작 앨범들이 퀸시 존스의 손을 거쳤다. 80년대 아프리카의 심각한 기근 사태를 돕기 위한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도 퀸시 존스였다. 열정 넘치는 그는 영화와 TV연속극 제작자로 변신하기도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컬러 피플The Color People'을 제작한 것도 퀸시 존스였고, 윌 스미스Wil Smith를 발굴해 스타 배우로 키워낸 것도 그였다.
다시 가수 헬렌 메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196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그녀는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록큰롤과 리듬앤블루스 같은 새로운 대중음악이 등장하고 미국서 재즈가 대중음악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 주된 이유였는데,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그때까지도 재즈의 열기가 식지 않고 있었다. 이 시기 헬렌 메릴은 이탈리아에 머물며 에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와 함께 이탈리아어 앨범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비틀즈가 등장하고 6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재즈는 유럽에서도 대중음악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때마침 60년대 중반 헬렌 메릴은 일본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고, 그곳서 UPI연합통신에서 일본 부지사장으로 일하는 도널드 버든Donald Byrdon이라는 남자를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대략 10년 가까이 일본에 정착해서 생활하며 음악 활동도 일본에서 한다.
일본인들의 오랜 재즈 사랑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LP나 CD 같은 음반 판매가 음악시장 수익의 중심이던 시절, 일본은 전세계에서 재즈 앨범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였다.
헬렌 메릴이 일본에 살던 그 시절, 확인할 기록은 없지만 그녀는 가까운 우리나라에 여행을 왔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이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한창 부흥하던 때라서 한국으로 여행오는 것이 일본서 크게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일본에서 그녀의 결혼생활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이 두 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이 났다. 동아시아 타국에서의 외로운 결혼 생활 중에 잠시 남편을 두고 홀로 일본과 한국의 낯선 도시들을 여행하는 아리따운 재즈 가수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녀의 노래처럼 가슴 한 켠이 애잔해진다.
부록2)
헬렌 메릴이 에니오 모리꼬네와 작업한 1960년도 앨범 ‘Helen Merrill Sings Italian Songs’ 중에서 <Estate>를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