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쫓는 ‘무언가’로부터-
‘제발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꿈에서 바란 적이 있다.
언젠가부터 난 ‘무언가’에게 쫓기는 꿈을 자주 꾸기 시작했다. 이 ‘무언가’란 정말 다양하다.
꿈에서의 내가 범죄자라면 경찰과 피해자들에게 쫓기고는 했는데, 이때마다 나는 나의 죄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잡혀서는 안 될 것 같았기에 도망쳤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의 신분으로 꿈을 꾸었을 때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쫓겨 다녔다. 선생님이 “000(내 이름이다.) 잡아!”라며 소리치고, 셀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이 우르르 운동장에서 뛰어오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심지어 나에게 아주 친절하셨던 고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의 모습이었기에 더욱 잊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 채로 다시 도망쳤다. 하다못해 사람이 아닌 것들도 날 쫓아오기 시작했다. 한 번은 큰 괴물이 우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으며 사람들을 먹어치웠다. 이 괴물의 생김새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긴 꼬리와 갈고리 같은 발톱을 가진 곰 정도의 생물체였던 것 같다. 어쩌겠는가. 도망쳐야지. 잡아 먹힌다는 사실보다, 그 갈고리 같은 발톱이 내 살을 갈라 뼈까지 닿았을 때의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깨고 나서 가장 어이없었던 ‘무언가’는 도라에몽이었는데,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입을 쩍 벌린 채로 날 미친 듯이 쫓아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굶주린 도라에몽이 가장 무서웠다. 내 어린 시절 추억 속의 귀여운 캐릭터가 날 보며 침을 흘린다는 것에 일말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아무튼 내 꿈은 사람이다가, 사람도 아니다가, 그런 ‘무언가’들에게 쫓기는 연속이었다.
‘쫓기는 꿈.’
이 꿈 풀이를 검색해 보았다.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이미 겪고 있었다.)
‘건강상태가 안 좋을 것으로...’(이미 안 좋았다.)
또 뭐라더라.
쫓기다가 잡혔는지, 도망쳤는지에 따라 또 달라진다고 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압박을 느끼는 상태에서 꾸는 꿈.‘
이거였나.
꿈 풀이는 아니지만, 꿈을 꾸는 원인을 찾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난 꿈에서만 쫓기는 것이 아니었다. 돈에 쫓기고, 일에 쫓기고, 인간관계에 쫓겨 다녔다. 돈에 쫓기는 기분을 느낄 때가 가장 처량했고, 일에 쫓기는 기분을 느낄 때가 가장 피곤했으며, 인간관계에 쫓기는 기분을 느낄 때는 한 없이 억울하다가 끝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저 셋은 네트워크 형성이 지독하게 잘 되어 있었다. 돈에 쫓기다 보면 일에 쫓기게 되었고, 일에 쫓기다 보면 인간관계에 쫓기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면 다시 돈에 쫓기고 있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 무한의 지옥, 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최근에 ‘무언가’의 꿈을 다시 꾸었다.
경찰에게 쫓겼고, 여전히 나의 죄명은 알 수가 없었다. 오랜 추격전을 벌이다가 비가 내렸는데 도망치다 보니 숲이 하나 나오는 것이었다. 젖은 땅에 발을 꺼트리며 꿉꿉하게 차오르는 숨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숲으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날, ‘제발 꿈이었으면.’하고 울면서 빌다가 퍼뜩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나는 달리던 발을 멈췄다. 가쁘게 차던 숨이 멎어 들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꿈에서 깨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쫓기던 숲 속을 둘러보며 자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날 쫓는 그들은 어차피 날 해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현실의 것들은 날 해칠 수 있다. 잡힌다면 상당히 아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꿈에서 깨어나도 지금의 현실에서 여전히 도망치고 있다. 나약하다는 말은 불쾌하다. 먼저 쫓아오니까 도망치는 것뿐인데. 그들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만큼 무책임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다르기에 서로의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같은 것에 쫓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세히 보면 미묘하게 다르다. 우리는 저마다의 ‘무언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굳이 꿈처럼 깨려고 노력하지 말자. 쫓기는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시간이 걸려도 날 지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무엇이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 도망치는 이상 우린 잡히지 않을 테니, 그들이 날 해칠 수 있다는 사실도, 어쩌면 그들의 존재 자체도 점점 잊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생각보다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쫓던 이들을 뒤로하고 숲을 둘러보았던 것처럼.
꼭 맞서 싸워야지만 이기는 게 아니라는 것.
열심히 도망치던 끝에서야,
비로소 극복하는 것도 있다는 반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