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다. 여름내 거미줄 친 자전거를 끌고 나와 자전거포에 가서 바람 빠진 바퀴를 한껏 부풀렸다. 여름잠을 늘어지게 잤던지 첫 바퀴가 굼뜨다. 천천히 달린다. 푸른 그늘 시원했던 자리에 해가 든다. 여름엔 빛 한 점 들어올 틈 없이 빽빽하게 그늘을 만들더니 빈 가슴이 되어서야 빛을 들인다. 앞서 달리는 사람의 뒷바퀴에 떨어진 잎이 날린다. 눈이 부시다. 한 해가 이렇게 가나보다, 때 이른 감상에 젖을 때 문득 오래 못 본 지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주말에도 일하는 그의 일터가 마침 가깝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여전한 안부를 묻고 전하다.
다리를 쉴 겸 햇볕 따뜻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10월 막바지의 주말 공원은 행사도 많고, 사람도 많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사람을 맞는 공원도 이 축제가 지나고 나면 한동안 텅 비고 쓸쓸해지겠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끌거리며 터질 것 같았던 오래된 집처럼. 오후가 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전거를 탄다. 나는 이쯤 타고 그만 집에 가야지 생각한다. 가만있자, 오늘이 혹시 장날인가? 찾아보니 맞다, 장날. 잘됐다. 장 구경 가자. 생각만으로도 엉덩이가 들썩인다.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을 가더라도 장날 장 구경을 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 지역 특산물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을 펼친 이들의 걸쭉한 입담도 그렇고, 주거니 받거니 덤을 청하는 양도 재미다. 연시가 무더기로 한참이고, 아직은 떫은 대봉시님 대거 등장이다. 할머니가 가꾼 조선호박도 우산 그늘 아래서 아롱다롱 색이 나고, 밤고구마, 호박고구마도 가격 붙은 바닥에서 딩굴댕굴 중이다. 9월 언젠가 활새우와 맘먹는 가격에도 새우를 과감히 포기하게 만들었던 주범인 파는 그새 가격이 많이 내렸다.
새우를 곁눈질하지 않은 건 아니다. 뭍에서도 바다를 향하려는 그의 열망을 보면 뭍에서 나와 뿌리를 잘린 채 허연 마디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파보다야 백 번 천 번도 파닥이는 새우를 택해야 한다. 그래도 나는 한 단 이만 원에 당당히 보성쪽파를 선택했었다. 그 아리고 매운맛을 우적이면 한동안 냄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그랬던 그가 오늘은 한 단에 칠천 원. 석 단을 살 수 있는 가격이라니 아니 살 이유가 없었는데 손이 모자란다. 장바구니 없는 자전거 양쪽 손잡이가 이미 용량 초과 흐흐흐. 미련한 마음을 들켰는지 “미리만 얘기하면 드라마 한 편 보는 시간에 쓱싹 까드려….” 하며 잡는다. 장꾼의 꼬리말을 애써 자르고 다음 장날을 기약했다.
손을 무겁게 한 건 청송부사와 꼬투리째 얼굴 내민 팥이다. 요즘 때깔 좋은 사과가 얼마나 많은데 무슨 자신감으로 얽은 곰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장바닥 물건으로 왔을까 싶은 사과는 아주 야무져서 한 톨 푸석거림이라곤 없을 듯 보였다. 팥은 1kg에 만 원이라기에 비싸 보여 한참 보기만 하다 안 사고 장을 한 바퀴 다 돌았다. 호랑이콩 종류를 파는 데는 많았는데 야들한 팥을 파는 곳은 거기밖에 없어서 비교할 데가 없었다. 마른 팥을 불려 먹는 것보다 햇팥을 밥에 넣어 먹는 맛을 좋아해서 결국은 다시 돌아 샀다. 짤막한 콩나물도 맛있어 보이고 은달래도 빛나 보이고, 파래도 물이 좋은지 바다향이 좋다. 너도 드루와, 너도 드루와 하다 보니 자전거 양쪽 손잡이가 만석이 됐다.
저녁은 팥밥을 했다. 팥에 어울리거나 말거나 콩나물 넣어 은달래에 청홍고추 다져 넣어 간장 양념해서 참기름에 고소하게 비볐다. 파래도 무랑 배 넣어 새콤달콤 무쳤다. 부추김치 한 접시 남은 걸 꺼내 밥상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장이 집으로 왔다. 아, 노곤하고 배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