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분 잘생긴 님 만나니 꿀이 뚝뚝
처음 모종을 심을 때는 맷돌호박이 뭔지 몰랐다. 호박도 종류가 꽤나 다양해서 애호박, 단호박, 늙은 호박, 주키니, 청둥호박…. 땅콩호박이라고 국수 가락 뽑듯 하는 호박도 있다. 맷돌을 상상하며 그저 호박이라니 좋아 고추랑 상추 모종 살 때 함께 사서 심었다. 호박은 화사한 꽃을 피웠다. 줄기를 내리 뻗었다. 딱 호박초롱을 만들면 세상 밝겠네! 할 만하게. 꽃 하나 필 때마다 호박 생각이 났다. 누구랑 나눌까 셈을 하면서 흐뭇했다.
어느 날 꽃이 싹둑 베였다. 이 무슨 일이고? 하나둘도 아니고 피는 족족 똑똑 따이는 거다. 자세히 보니 칼로 벤 것처럼 싹독이다. 호박을 심었는지, 고추를 심었는지 아는 사람만 아는 데를 누가 알고 와서 땄다는 말인가. 떨어져 시들어가는 모양새가 안타까워 주위를 둘러봤다. 개미가 해마다 산더미 같은 흙더미를 물어 올려 집을 짓는 게 영 못마땅한 차였는데 혹시 이들이 베어놓고 딴청인가 엄한 의심을 했더랬다.
알고 보니 똑똑 떨어진 꽃은 수꽃이었던 것. 어떤 호박인지도 모르면서 심은 것도 그렇고, 지는 꽃이 수꽃인지 구별조차 못하는 사람이 호박을 보겠다고 야단을 했다. 알만한 분께서 아마 수꽃이라 그럴 거라고 말해주기 전에는 끝내 개미를 의심했을 것이다. 맷돌호박은 늙은 호박이다. 내 농사에선 그를 못 보았으나, 겨울엔 호박만 한 게 없다. 내어주는 품이 호박 따를 자가 없다. 특히나 늙은 호박은 떨어지는 꽃조차, 속에 들앉은 씨조차도 버릴 게 하나 없어 뽀얗게 분이 제대로 앉은 잘생긴 늙은 호박을 만나면 눈에선 꿀이 뚝뚝이다.
먹어야 맛인가, 겨울 내내 두고 봐도 좋지. 거둘 게 하나 없는 한 해를 보냈어도 들어오는 현관에, 부엌 찬장 위에 떡하니 올려두면 내 거둔 양식인 양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찬바람 몰고 들어오다가도 그를 보는 순간 몸에 온기가 돌며 입 꼬리가 올라가고, 굴비는 아니어도 찬장 위에 버티어있는 그를 바라보노라면 추운 날 언제라도 내 몸 데워줄 화로를 보는 것만 같아 따뜻한 맘 들었다.
그러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려는 날 이대로 뒀다간 가뜩이나 늙은 호박이 파파할머니 될 것 같아 죽이라도 끓이자 내리자 밑이 물렁거린다. 바라만 보다 아까운 지경을 당하고 말았다. 그 지경 후로는 오래 뜸 들이지 않는다. 적당한 크기의 적당한 호박을 사서 아련한 눈으로 눈요기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그의 노란 속을 연다. 오늘이 그날이다. 단내에 나도 모르게 그만 호로록 씨 붙은 데를 입에 넣는다. 단맛은 영 없는데 냄새가 그만이다.
죽 끓일 반 통은 듬성듬성, 반 통은 전 부칠 요량으로 채를 썬다. 강화 속노랑 고구마 두 알 남은 거랑 팥을 넣어 죽을 끓인다. 찹쌀은 없고 맵쌀가루 남은 게 있어서 그대로 털어 넣었다. 밥알 뭉친 거처럼 희끗희끗 올라오는 게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끓이자마자 한 그릇 떠서 한 숟가락 입에 넣는다. 쨍글 했던 해가 입 안 가득 들어온다. 호박이 열었던 하늘과 땅의 시간을 들인다. 마침 빈속이 뜨끈하다.
「호박꽃 초롱」 서시
(…)
한울은 풀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버슷을 사랑한다
모래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두틈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시인을 사랑한다
(…)
이러한 시인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그러나
그 이름이 강소천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정본 백석시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