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이천봉의 경지

spring! 머지않아 올,

by 달랑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깜장고무줄 하나와 친구들만 있으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고무줄놀이는 재밌었다. 발목 낮은 데부터 시작해서 무릎, 허벅지, 허리, 겨드랑이, 어깨, 머리, 위로 한 뼘, 두 뼘, 손을 쭉 뻗어 까지 점점점 높아지려면 끝까지 살아남는 아이가 있어야 한다. 높이가 달라질수록 노래도 달라지지만, 고무줄 잘 뛰는 아이는 물구나무까지 서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기예를 보는 것만으로도 응원하는 재미, 함께 하는 재미가 있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발길을 멈추고 쳐다만 봐도 주인공이 된 듯 우쭐했다. 한 바닥이 끝나면 지켜보던 아이들의 도전과 그만할 아이들, 더 놀 기력이 남은 이들이 갈려 팀은 다시 짜진다. 사방치기, 말타기, 땅따먹기.. 요즘같이 화려한 놀잇감이 없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땡볕이 대순가, 땀을 뽈뽈 흘려 땟국 흘러도 더운 줄, 더러운 줄 몰랐고, 추위에 언 볼이 터져도 추운 줄 모르고 놀았지. 어찌 그리 놀았을까 가만 생각해 보면 한계를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최선이야,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오늘은 발재간 타령으로 발목에서 나가떨어지지만, 낼모레는 무릎에서도 신기를 펼칠 수 있는 ‘기술’이란 걸 해를 더하며 배웠기 때문이기도 했을까. 먼저 떨어진 아이는 바로 다음 할 일이 있었기에 누구도 하릴없이 혼자가 되지 않았다. 행여 코 빠뜨리고 앞주머니 가득 손넣고 훌쩍이는 아이가 보일라치면 “우리 얘 끼워주자, 일루 와” 깍두기가 되었다. 못하는 이만 깍두기가 아니다. 너무 잘해도 깍두기가 된다. 누구나 되는 깍두기이기에 자진하기도 한다. 실은 사알짝 자신이 없어 먼저 오늘 나, 깍두기! 를 자진하면 더 좋다. 그래, 너 깍두기. 가 된다. 선하기 깍두기를 청한 그의 실력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고수나 올랐던 일만이천봉의 경지는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를 경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건 다른 놀이에선 그가 젬병이기도 했기 때문. 우리들의 놀이는 그래서 언제나 인간적이었다. 그렇게 한 동네에서 자란 그 친구가 중고등 동창이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이십 년 못 만나고 몇 년 전부터야 연락이 닿았다. 못 만났던 세월이 고무줄 튕기듯 확 당겨와 어제도 만난 사이같이 흉허물이 없다. 유안진의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하이틴로맨스처럼 고백하던 날들이 문득 웃겼다며 키득이는 중년의 아줌마들이 되었다.


옛 생각만 하면 말이 길어진다. 아침인데. ‘떨어질 때보다 높이 튀어 오르기’ 책문구를 보다 떠오른 생각들을 적었다. 한계를 모르고 넘던 고무줄이 하는 말, 나를 넘고 싶으면 한 번 더 해봐, 어제보다 조금 더. 난 잘해야 허벅지나 허리께 정도 갔을까. 그래도 희열이 넘쳤다. 한계를 정할 줄 몰라서기도 했고, 얘기했던 것처럼 못해도 다 끼워주는 인정의 덕이기도 했다. 자라면서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작아져갔다. 무엇으로의 한계인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는 겪어본 이는 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그런 완충지대도 없던 딸을 보며 대신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엄마인 나는 늘 기도하는 마음이다. 한계를 권하는 사회에서 어른으로 서기 위해 수없는 긴장의 날들을 보내는 지금의 청춘들에게 추운 오늘 아침, 따뜻한 물 한 잔 권하고 싶다. spring! 머지않아 올, 봄의 탄성을 믿어보자고 말하고 싶다. 딸은 잊었을거다, 자기가 어려서 그린 저 지렁이 줄넘기 그림. 순간순간 재미나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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