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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와 딸깍발이

소리엔 이유가 있다

by 달랑무

드디어 찾았다. 불 끄고 누우면 뜨윽 뚝 딸깍 딸깍... 소리 내던 놈! 이 소리가 어떠냐면 손톱으로 뭔가 딱딱하고 단단한 뭔가를 정교하게 다듬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 긁는다고 해야 될까, 리듬도 없이 일정하지도 않게 야금야금 난다. ‘아, 뭐지 이 소리?’ 혼자 자려고 누웠을 땐 ‘누가 살살 문을 따나?’ 무서운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겨울 추웠던 1월 언젠가, 따뜻한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미처 다 못한 일들을 끄적거리던 늦은 밤이 있었다. “뚝!” 소리가 베란다 쪽에서 났다.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세웠는데 이후론 소리가 안 났다. 지나가는 소리였거나 창고 안에서 뭔가 질서를 놓친 애가 아귀를 맞추느라 정리되는 소리쯤으로 여겨 말았다.


항아리를 좋아하고 아낀다. 고만고만한 항아리들이 동글동글 윤이 나게 자기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게 그렇게 예쁠 수 없다. 올해는 여기 뭘 담을까 쓸모를 가늠하는 재미도 있고,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며 안부를 묻는 재미도 있어서다. 한 해 한 해 용도를 다한 항아리들은 깨끗이 씻어 냄새 뺀다고 물을 그득하게 넣어놓기도 했다.


항아리 안에 넣어놨던 물이 유난히 추웠던 그 해에 얼어 팽창하면서 항아리가 깨지고 말았다. 물을 덜 채운 항아리는 무고했다. 물을 가득 채운 항아리들만 물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대로 품은 채로 얼면서 금이 가다 뚝!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동백꽃 지듯. 가난한 이유를 대자면 겨울이라고 항아리를 돌보지 못하긴 했다. 내겐 말로는 힘든 어려운 해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내 마음 헤아려 가슴 가득 있던 묵은 물때 이제 그만 씻어내라고 항아리가 건넨 말일 수 있다. 지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항아리 뚜껑만 남아서 할 일을 찾고 있었다. 어떤 뚜껑은 화분 물받이로 쓰기도 하고, 어떤 뚜껑은 여기저기서 주워온 솔방울을 넣어 가습기처럼 물을 넣어놓기도 한다. 가끔 모과도 올렸다. 올해는 도토리 세 알도 들여왔는데 오늘 드디어 소리의 주범을 잡은 거다. 도토리거위벌레 알이 유충이 되는 중이다. 딸깍 딸깍 육질을 파먹고 가루를 구멍 밖으로 뱉어 내느라 소리를 낸다. 숲의 한가운데 있었으면 웬만한 소리쯤 묻히고 조용히 땅으로 돌아가 여름을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집에서 거위벌레의 자손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느라 저리 기를 쓰고 있다. 여물기도 전 푸른 도토리에 알을 낳곤 떨어질 때 충격을 생각해 가지째로 포르르 내려앉힌 부모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잊지 않겠다는 듯….


소리엔 이유가 있다. 깨지며 나는 소리든, 구멍을 내며 나는 소리든. 힘을 빼야 할 땐 버티지 말고 덜어내면 된다. 가득 채우지 못해 소리가 나면 좀 어떤가. 비어있어서 오래 울리는 소리도 있는 걸. 마음의 허기를 돌보지 못한 사이, 추운 계절에 아끼던 이들을 잃었다. 추워지는 계절에 끊임없는 신호를 보냈을 소리를 잃어보고야 들었다.


때맞춰 다른 세상과 만날 준비를 하느라 부지런히 몸을 살찌우는 유충이 내는 소리도 있다. 소리가 소리를 부르는 법인지 이미 자기 세계를 단호히 떠난 항아리가 부른 생명의 소릴거라 생각한다. 혹 그가 떠난 세상에 티끌만 한 미련의 맘이나마 있다면 ‘너는 천천히, 조금씩, 서둘지 말고 물처럼 흘러 오래 남으라’고 말하진 않았을까. 거위벌레의 자손이 며-칠을 끌며 구멍을 내는 소리가 꼭 그랬으니까.


살다 보면 계절을 타는 법을 잊기도 한다. 비어있는 곳이 유난히 텅 빈 것 같을 때도 온다. 가을 한 자락 도톨 열매 주워 왔을 때 계절이 집으로 왔다고 좋아했다. 그러기 잠시, 야금지기 소리가 나기 전까지 집에 온 계절을 잊고 지냈다. 계절 이미 지나 빈자리에 지나간 시간을 깨우며 딸깍발이가 왔다. 보이지 않는 것이 숨어 깨우는 계절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들리는 것보다 들리지 않았던 진공의 시간에게,

비어있는 것이 주는 공명의 진동에게 오래 영광 있기를….

잠깐 어떤 운명으로 우리 집에 온 어린 생명을 이제 땅으로 돌려주러 가야겠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는 자연의 질서에게 심심한 마음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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