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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마음과 해장국 모순

결혼선물로부터 오는

by 달랑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막내이모가 결혼 선물로 주신 도자기에 쓰인 글귀다. 이모는 엄마의 틈을 대신해 마음으로, 주전부리 간식으로 우리 삼 남매를 자주 돌봤다. 그런 믿음 때문이었을까,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도 다음날 눈을 뜨면 먼저 보이는 것이 <종합선물세트> 과자이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날이 있었다. 산타클로스가 있다면 그는 이모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어렸을 땐 정말 정말 추운 겨울날들이 길다고 여겼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슬레이트 지붕 낮은 홈마다 매달린 고드름이 해 비껴가는 자리마다 똑똑 떨어진다. 담벼락마다 쌓인 푸른 눈은 어떻고.


나무박스를 풀러 꺼낸 도자기는 옥빛이 돌았다. 글귀의 마지막엔 임신년 좋은 날.이라고 쓰여 있다. 이모는 말했다. “많이 참아야 한다, 네가 먼저 참으면 백년해로할 거야.” 그 말은 와닿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결혼, 누가 먼저 참고 말고 가 어딨어. 잘못한 사람이 먼저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 걸 가지고 괜한 걱정은...’ 입으론 그러마고 끄덕였지만, 맘은 달랐다. 세간살이 단출한 신혼집에 외딴 객처럼 그의 자리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TV장 위나 그 옆, 현관 근처 거나 거실 한편, 이사할 때마다 그가 앉는 자리는 대중없었다. 아무 데나 채우면 되는 자리, 그에게 마음이 있다면 세간과 딱히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자리를 이리저리 재는 나를 보는 게 고역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지금껏 함께 왔다.


누구라도 그럴까, 결혼생활이 이어질수록 이모의 말은 아귀가 맞아갔다. 마치 한 면이 같은 색깔을 찾느라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쪽 색깔을 맞추면 다른 쪽 색깔이 달라 다시 온 길을 헤매는 퍼즐 같았다. ‘잘못한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누구’의 어떤 입장이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모든 것에 두루 미치거나 통하는 보편적 기준을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이해는 잘못한 사람이 상대에게 구하는 것이지, 일방의 희생 아래 묵인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갈수록 곁가지의 정의는 더욱 늘어갔다. 그러다 세를 불린 ‘정의定義 ’의 나무는 서로 나 옳소, 날을 세우며 무성해갔다. 어느 날부턴가 나무는 그러길 멈췄다. 정확히 언제쯤인가는 모르겠다. 아마 내가 완경을 맞으면서부터일까, 남편의 건강에 불이 들어오면서부터일까, 하는 짐작을 한다.


시원한 해장국을 먹고 싶다는 말에 그가 좋아하는 해장국을 사러 나선 길. 걷다 우연히 듣게 된 <그리운 마음> 가곡에 지난 얘기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바람은 불어 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 흘러 천리를 가네.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옷깃에 감추고 가는 세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내가 옳다 내세우며 너를 외면했다. 너는 왜 나와 같은 색깔이 될 수 없느냐고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런 나의 마음을 너는 모르쇠로 일관한다고 믿었다. 지나고 보니 이는 사실 여부를 떠난 나의 생각이다. 내 가치 기준에 더욱 기울수록 너는 나쁜 놈이 되어갔다. 가장 가까이 사는 이를 두고 밥맛 운운했다. 그래, 밥맛없는 그에게 입맛 도는 음식을 사러 나온 나는 모순이다. 지금껏 내가 ‘맞다’고 생각했으며 그건 ‘틀리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했던 나는 모순이다. 가만있자니 보릿자루 노릇 싫고, 입을 열자니 굴비를 엮을 기세의 모순덩어리.


참아야 하기도, 아니기도 하다. 나만 그렇다고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사랑이기도 하고 미움이기도 하다. 그렇게 청산에 바람이 불었고, 옷깃에 감춘 세월 천 리를 셈하는 요량으로 살아왔다. 한 사람을 대상 하는 마음이 이렇다.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겠지. 해장국 들고 <그리운 마음>을 듣고 들으며 천천히 걷는다. 집에 돌아와 도자기를 본다. 이모가 말한 뜻을 오늘에야 조금 알 것 같다. 해장국을 맛있게 먹는 남편에게 ‘나도 그렇지만 당신도 고생 많았어. 삶의 모순이 지닌 힘들을 믿고 잘 살아 봅시다’ 속마음을 전했다.

갑진년 1월 눈내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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