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젊은 시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nderer Jun 13. 2023

흐린 눈으로도 보이는 것

영화 '애프터썬'


 어린 시절의 질문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그때의 나는 아빠한테 무슨 질문을 하던 아이였을까? 하늘은 왜 파랗냐, 롤러코스터는 언제부터 탈 수 있냐 내지는 이런 질문도 해본 적 있겠지. 아이는 어떻게 생겨요? 같은 짓궂은 질문들. 나는 어른들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은 알아서 자제하던 눈치 빠른 아이였을까? 아니면 그런 질문들만 골라서 물어보는 개구쟁이였을까? 아이와 어른의 관계는 무엇하나 선명하지가 않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질 때도 있고, 질문이 없는데 정답이 나올 때도 있는 법이다. 완성하지 못한 문답들이 넘쳐나는 관계는 명확할 수가 없다. 흐린 눈으로 봐야만 한다. 빠르게 철들어 시간을 건너뛴 아이에게서는 애잔함이 남아있다. 일찍 크면 그때의 질문들이 몸과 마음속에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흐린 눈으로 보아왔던 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진짜로 눈이 흐렸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땐 일부러 안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뿌옇게 하고 지냈다. (당연하게도) 엄마는 항상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뿌옇게 있으면 앞이 보이느냐고. '보이니까 이러고 다니지.' 대충 이런 대답을 했다. 한숨을 쉬면서도 엄마는 꼬박꼬박 주방세제로 안경을 닦아줬다. 그러면 안경이 좀 더 오래 선명했다. 수경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은 그렇게 닦는 게 싫었는데 이상하게도 수경은 세제로 하는 게 좋았다. 물속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을 싫어했다. 바닷가를 가서 바다수영을 할 때도 수경은 꼭 챙겨서 갔다. 언제부턴가 안경은 잔기스도 덜 났다. 긁히거나 상하는 일 없이 점점 두꺼워져 갔다. 그러면서 일부러 안경알을 문지르는 일은 그만두게 되었다. 안경이 선명해져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대충 그때부터 무릎도 덜 까지기 시작했다.


 딸 소피와 아빠 캘럼은 튀르키예로 여행을 왔다. 캘럼은 소피와 함께 이곳저곳 휘적휘적 돌아다닌다. 방학에 잠깐 시간을 낸 여행인지라 마냥 자유스럽지는 않다. 패키지 여행이기도 하고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돈을 쓰는 데 눈치도 보인다. 캘럼이 애써 감추려는 모습들은 티가 난다. 애써 '감추려'해서가 아니라 '애를 써서' 티가 난다. 행동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노력하고 있어서 보인다. 사춘기 소녀는 그 짧은 여행 기간 동안에도 자라난다. 의도치 않은 무심함과 조숙한 배려심이 부딪힌다. 두 세계는 충돌하면서 부서지고 충돌의 여파로 기억은 흐릿해진다. 단편적인 사실들은 먼지 구름이 되어 주관을 뒤덮는다. 기억을 반추하는 과정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리는 것들은 이제야 보이는 아빠의 이야기다.


 캘럼은 잘 들어가지 않는 잠수복을 억지로 입기 위해서 몸을 구겨 넣는다. 요령이 없던 그는 청년의 도움을 받고 옷을 입는다. 계절마다 여행을 떠나던 청년은 아기와 함께 고향에 머무르게 되었다. 40살의 자신이 상상하기 어렵다는 청년을 보면서 캘럼은 몸을 구기느라 가쁜 숨을 몰아 내쉰다. 기나긴 한숨을 푸른 바다에 흘러 보낸다. 아빠는 차분하게 가라앉고 딸은 솟아오른다. 푸르른 대자연 속에서 캘럼은 꾸준하게 운동을 한다. 수련보다는 수양의 형태이다. 호텔방 TV 옆에는 태극권 비디오가 놓여있다. 명상과 태극권, 어린 소피는 아빠를 캠코더로 촬영하고 영상을 본다. 녹화하지 않은 채로 아빠에게 묻는다. 11살 때 아빠는 뭘 했나요. 이윽고 아빠의 대답이 이어진다.


 다 큰 소피는 기억을 되짚어 아빠를 상상한다. 이제는 아빠의 상태를 대신 답할 수 있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비슷한 상황이었겠거니 넘겨짚으면서 답을 고민한다. 마음속에만 넣어두고 있던 감상을 끄집어 올린다. 추억하는 일이 어려운 건 묵혀두었던 감정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주로 좋은 감정보다는 싫고 슬펐던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추억은 언제나 즐거운 행위이기 마련이다. 오랜 친구들을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과거의 특정 시점과 사건들에 고정되어 있는 걸 떠올리면 명확하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상황을 판단하기엔 지나치게 함축적이거나 암시적이다. 상상과 추리의 영역에서 해석하면 영화는 더없이 무거워진다. 나풀나풀한 한여름에도 세계는 절망스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그렇지마는 여름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공평하니까. 추울 때는 껴입어야 하는데 더울 때는 벗으면 되니까. 여름은 돈이 많건 적건 티가 덜 난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니 그나마 여름이 낫다. 공평하게 견디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궁핍한 건 마음으로 족하다. 캘럼은 열심히 소피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준다. 소피도 아빠에게 선크림을 발라준다. 소피는 아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소피는 의젓한 아이다. 아니, 세상에 선크림 바르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어디 있나. 끈적끈적한 피부는 다들 싫어한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건 소피가 충분히 아빠의 처지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다. 눈으로 보이는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게 아니다. 선크림처럼 그냥 스며들기를 바라는 거다. 덜 따갑고 덜 아프게끔. 두 사람은 서로를 정성껏 발라준다. 그저 여름을 견뎌내기 위한 손길이다. 그러니 이미 탄 피부에도 발라야 한다.


 그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던 질문과 대답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는 시점이 온다. 명확하지 않은 문답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다 이해하진 못해도 사랑의 흔적이었다는 건 알 수 있다. 사랑은 정확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흐린 눈으로도 볼 수 있다.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어른이 되면서 어릴 때의 질문은 잃어버렸는데, 어렴풋하게나마 답은 구한 것 같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애프터썬'

매거진의 이전글 꽃가루 알레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