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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Feb 24. 2024

하늘 아래 새로운 관점이 있을 뿐이야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하고 싶다", "~하려면 ~하라", 서점 매대에서 흔히 마주치는 책 제목 유형이다. 이런 문장형 제목들은 몇 년 전부터 유행하여 근래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개중에는 성공적 삶을 판매하는 광고 문구 같은 것들도 있고, 일기 속 넋두리 같은 것들도 많다. 자기 계발과 자기 위안이라는 상충된 두 가지 현대인상이 요즘 출판의 셀링포인트로 각광받는 가운데, 이 책 제목은 신문 사회면의 헤드라인처럼 일견 무미건조하다. 400여 쪽 길이가 적지 않게 느껴질 법도 하건만, 그런데 의외로 경쾌하게 페이지가 넘겨질 때 한 번, 다 읽고 난 후 제법 생각거리가 담긴 제목이었구나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흥미로운 책이다. 장애와 예술, 그리고 우리네 사회대한 독후감들은 이미 많으니 여기선 나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 다른 감상을 해볼까 한다. 열일곱 자 제목을 세 토막 내어 세 가지 구성으로 담아 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관점이 곧 창의

-1.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누구나 흔히 들어봤을 문장이다. 여기에 나는 언제나 한 문장을 더 갖다 붙인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새로운 관점이 있을 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기에 뒤에 갖다 붙인 문장을 순수창작물이라고 우기긴 물론 무리다. 그러나 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하는, 이른바 '창의성'이 숨쉬기처럼 요구되는 직업을 가진 나로선 저 두 문장을 붙여 생각하는 건 들숨 뒤 날숨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한라산 백록담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성판악 코스냐 관음사 코스냐에 따라 눈에 품는 풍광은 달라진다. 요지인즉슨 새로움이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다는 얘기다. 같은 것을 달리 보는, 관점이 곧 창의이다.


-2. '관점(觀點)'이라는 건 말 그대로 '보는 지점', '시각(角)'이라는 것은 '보는 각도'를 말한다. 늘 보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서서, 익숙한 각도 말고 낯선 각도로 바라볼 때 그 무엇은 새로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원천적으로 따지면 '점'과 '각'을 달리하기 전에 '관'과 '시'부터 뒤집는 게 먼저겠다. 보는 걸 보지 않는 것만큼 새로운 관점이 어디 또 있으랴? 이 책이 때리는 첫 번째 뒤통수는 보는 행위를 당연시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시각중추는 대뇌피질 후두엽에 위치하므로 '뒤통수'는 꽤 적절한 비유라고 '본'.)


저자의 친구이자 이 책의 주인공인 시라토리 씨는 어려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딱하다며 그를 동정하는 시선에 정작 "나는 괜찮은데" 하고 지팡이를 탁탁 짚으며 혼자서 전철도 타고 술도 취해보면서 잘만 지낸다. 남들이 큰일이구나 할 때 "왜? 뭐가 큰일인데?" 하는 쿨함이 있다. (그의 이런 쿨한 캐릭터는 이 책이 술술 읽히는 이유 중 하나다.) 어느 날 시라토리 씨는 미술관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전맹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말로 작품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작품을 보는 방식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눈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일치하지는 않아요. 그런 인식의 엇갈림 (120p)


결핍이 곧 창의

-3. 우리의 감각 중 시각은 가장 강력한 감각이다. 시각이 주는 명료함은 효율적인 판단에 크게 기여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차단한다. 시각적 데이터는 우리 이해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통제한다. 그렇다면 시각이 감지되지 않을 때 우리는 절대적으로 열악한 이해의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압도적인 시각이 배제되면 그 뒤에 가려져 있던 다른 감각들이 해가 진 뒤 드러나는 별들처럼 빛을 내기 시작한다. 특히 청각은 상상의 자극이라는 측면에서 시각을 능가한다. 보지 않고 들을 때 우리는 훨씬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시작한다. 라디오극장에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창조적 이미지를 자발적으로 그려낸다. 가장 강력한 감각이 차단되어서야 비로소 상상의 열린 능력이 발휘된다.


-4. “Scarcity breeds clarity." (부족이 명료를 낳는다) 구글의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이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때 인력감축을 앞두고 말이다. 자원이 부족할수록 명확한 목표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라고 한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선언이라지만 직원을 자르면서 한 말이니 냉정하고 무섭게 들리기도 한다. 그런 거부감은 잠시 내려놓고 표현 자체에 집중해 보자. 나는 다음과 같이 단어 하나치환하여 나만의 표현으로 바꿔보았다. “Scarcity breeds creativity.” (결핍이 창의를 낳는다)


-5. 부족과 결핍의 다른 말은 '여지'이다. 정글의 법칙을 처음 촬영할 때의 일이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말라비틀어진 아프리카 오지의 외딴섬에서 몇 날 며칠을 굶은 우리는 악에 받쳐 기어다니는 뱀이라도 잡아먹고자 눈에 불을 켜고 구석구석을 뒤졌다. 하지만 뜨거운 모래밭 어디에서도 뱀은커녕 지렁이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고, 덥고 배고픈 우리는 몇 없는 높다란 야자나무 그늘 아래 맥없이 누워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모두가 누워 시선이 위로 향했을 때, 나무 꼭대기 야자 이파리 사이로 뱀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발도 없는 그 높은 나무 위에다 똬리를 틀고 있을 줄은 아무예상치 못했다. 하긴 녀석도 멍청이가 아닌 에야 숯불처럼 뜨거운 모래밭 맨땅에 나 잡아 잡숴라 뒹굴 턱이 없지. 뱀은 당연히 땅바닥을 기어다닐 거라는 고정관념이 죽도록 아래만 훑게 만들었고 정작 머리 위에서 놀고 있던 답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기진해 누웠더니 새로운 시야가 열렸다. 는 걸 포기했더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결핍하여 내려놓여지가 생겼고 국면 창출됐다. 문이 닫히면 반대쪽을 보자. 종종 다른 문이 열려 다.



[예술을 보러 가다]


그는 전혀 다른 상상력을 써서 컵을 본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눈이 보이는 사람 또한 시라토리 씨가 보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139p)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6. 본다는 것은 빛을 감지하는 행위다. 우리는 물체에서 반사되어 나온 빛으로 그 물체를 정의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본 은 해당 물체가 온몸으로 흡수한 것을 빼고 남은 나머지이다. 대상의 고유 색깔이라고 믿은 것은 사실 대상이 반사한 빛인 것이다. 사과는 빨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색이다. 달리 말해 우리 뇌는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빛을 기계적으로 해독할 뿐, 그것이 곧 대상의 본질이라고 하긴 어렵다는 얘기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와 예술을 보러 가다> 『目の見えない白鳥さんとアートを見にいく』이다. 한국어판에서는 '시라토리 씨'를 '친구'로 바꿨다. 혹시 영역도 되었을까 싶어 구글 검색을 해봤는데 그건 없고 이베이에 올라온 중고책 포스팅만 하나 눈에 띄었다. 그런데 누군지 몰라도 영어로 바꿔놓은 제목이란 게 Going to see art with a blind swan. 엥? 스완? 갑자기 웬 백조? 도대체 무슨 번역기를 엉터리로 돌린 거냐 피식 웃다가 다시 보니 어라, 시라토리 씨의 이름 한자가 백조(白鳥)였다! 오호라 눈이 보이지 않는 백조와 예술을 보러 간다니, 거 뭔가 심오하기도 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세상은 온통 검은색일 거라고 우린 생각한다. 누가 말해준 적도 없고 어디 교과서에 나와있지도 않은데 지레 그렇게 짐작한다. 한국어판 표지엔 알록달록 컬러풀한 배경 한가운데 눈에 띄게 새카만 사각형 창이 큼지막이 박혔다. (참고로, 무척 예쁘면서도 센스 있는 디자인이다. 지극히 설명적인 일본어 원판 표지보다 훨씬 낫다.) 보이지 않으면 검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네 관념이다. 하지만, 시라토리 씨가 보는 세상이 그렇게 칠흑같이 어둡기만 할까? 어쩌면 백조처럼 새하얗게 눈부시진 않을까? 저 위에서 사과 얘기를 했지만, 빛의 입장에서 보면 검다는 건 블랙홀처럼 모든  흡수했다는 기니 시라토리 씨로서는 사실상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더 풍부한 감상이 가능한 감상 부자인 건 아닐까? 이리 상상하고 보니 백조야말로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은가 말이다.



또렷이 볼 것인가 넓게 볼 것인가

-7. 몇 년 전 생태계 교란종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송하면서 말벌이 보는 세계를 구현해 보자고 편집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다. 벌의 겹눈에 비친 상은 이리 왜곡될 것이며 녹색 틴트가 낀 듯 색감은 저리 다를 것이라고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처리했었다. 하지만 CG의 한계와 함께 무엇보다 이조차 인간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라는 답답함을 가졌던 기억이다. 벌이란 녀석이 세상을 보는 도구가 꼭 눈인 것만도 아닐 터.


인간의 뇌까지 조종하겠다는 야심 찬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에 대한 동영상을 최근 보았다. 가까운 미래에 꿈을 영상기록으로 남기는 기술도 개발될 거라는 설명이었다. 눈뜨자마자 모래알처럼 즉시 눈썹 사이로 빠져나가는 간밤아쉬운 끝자락을 잡을 수 있다면 기술적으로 의미 있는 진전이겠으나 그것이 과연 꿈을 기억하는 최선의 방식일진 잘 모르겠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멀겋고 부연 아지랑이 톤과, 제멋대로 떠다니는 거품 안에 갇힌 듯 고장 난 고유감각, 그런 어떤 아스라함들을 걷어낸 채 그저 시각적 환원의 결과물로만 꿈이 정의된다면 왠지 좀 슬플 것 같다. 4D, 5D, 영상 기술에 감각차원이 아무리 덧대진다 해결국 환원이란 작업은 시선을 하나로 고착시키는 단순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인식이 분명해지는 대신 다채로운 해석은 포기된다. 좁지만 또렷이 볼 것인가, 희미하더라도 넓게 볼 것인가? 책의 네 번째 챕터 <빌딩과 비행기>에서 저자는 9.11 참사를 그린 그림을 감상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하고, 서로 다른 정의가 있다. 관점을 바꿔보면 누군가의 정의가 존재한다. 그처럼 정의와 정의가 충돌하여 산산이 부서질 때, 그 파편은 때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까지 다치게 한다. 그러니 하나의 정의를 믿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무도한 칼날을 휘둘렀을 수 있다. (147p)


장애 < 다름 < 넓힘 < 예술

-8. 책 중반에 이르면 시라토리 씨가 관객에서 작가로 변신하는 흥미로운 구성이 펼쳐진다. 시라토리 씨는 외출할 때면 항상 자그만 디지털카메라를 들고나가 거리의 풍경을 찍는다. 눈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찍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찍어놓은 사진들이 수십 만 장이 넘는다. 그걸 누군가가 예술 프로젝트로 만들었고, 이제 시라토리 씨는 갤러리에 듯한 자기 전시실을 갖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단. 세상에 맹인 사진가라니, 두 번째 뒤통수!


객체에서 주체로. 경계 밖에서 경계 안으로. 여기서 중요한 경계는 고정된  개인의 노력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경계 자체가 외연을 넓혀 다양한 주체들을 포함해 내는, '확장'라는 키워드다. 만사를 이분법으로 나누기 좋아하는 우리는 장애도 비장애에 대한 타자적 개념으로 갈라내지만, 사실상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부터가 비정상인지 그 경계라는 건 아주 모호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정도도 다양할 텐데 전맹이면 장애고 약시면 아니라고 할 건가? 그렇다면 노안은? 다초점 안경 없인 루테인지아잔틴 약통 설명서가 안 뵈는데, 백내장 오고 실명되기 전까진 걱정 말고 정상이라고 위안 삼으면 되는 걸까? 애매모호한 경계면 사이사이, 약간서로 다른 수많은 고유한 상태들이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우린 자주 간과한다. 차이를 위계로 보지 않고 다양한 양상으로 받아들일 때 편 가르는 경계선이 아닌 끝 모르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다름을 넓힘으로 승화시키는 작업, 그게 바로 예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내면에 똬리를 튼 빡빡한 규범의 바깥으로
용기 내어 한 발 나가 자기 규제를 해제하면
'보통'과 '정상'과 '당연'의 영역이,
다르게 표현해 '편안한 삶'의 폭이 넓어진다. (240p)



[친구와]


지금이라는 상태

-9. 이제 책은 후반부에 다다랐다. 저자는 시라토리 씨와의 관람 동행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과연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일지 고민한다. 차별에 대한 이야기일지,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일지, 그러다 돌연 '지금'이라는 화두를 꺼낸다.


 여기까지 읽었다는 표식으로 책에 책갈피를 끼우듯이
여기까지 살았다는 표식으로 인생에 '지금'이라는 책갈피를 끼워 넣는 것. (322p)


어쩌다 저자의 생각이 이리튀었는지 책의 뒷이야기를 굳이 옮기진 않겠다. 다만 난데없이 '지금'이라는 화두가 나왔을 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공감되는 포인트가 있었다.


-10. 누구는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누구는 과거에 의미를 덧씌우는 건 미래라한다. (심지어 카를로 로벨리 같은 물리학자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다.) 이러나저러나 우리 모두는 항상 현재를 산다. 각자의 현재들이 모여 지금이라는 우주만든다. 셀 수 없이 많은 고유상태들저마다 복작거리는 시공간은 매우 혼돈(chaos)스러워 보이지만 조화롭다. 우주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 코스모스(cosmos)인 이유다. 우주는 그렇게 확장되며 열적 평형을 향해 나아간다. 물리학에선 이것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부른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흔히 엔트로피를 정돈된 방이 시간이 지나면 어지럽혀지는 것처럼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거라 설명하는데 이는 질서라는 단어의 애매한 정의 때문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주에 위계로서의 질서(order)는 없다. 우주의 방향은 단지 더 높은 가능성을 찾을 뿐이다. 더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할 확률, 그것은 바로 모래알처럼 수많은 가능성들을 지닌 고유상태들의 조화( harmony)다.


결국, 어우러짐

조화는 획일과 다르다. 우리는 제각각 고유하다. 우리는 같지 않기에 공존한다. 서로 다른 크기의 짱돌과 조약돌과 모래알 층을 거칠 때 강물은 정수된다. 우린 다른 누구도 될 수 없다. 다만 서로를 인정하고 매일같이 가까이 다가갈 순 있다. 그리곤 조용히 깨달을 수 있다. 어지러움이 곧 어우러짐이 되는 놀라운 진리를. 결국 시라토리 씨와 친구들이 찾은 것은 함께 한 것 자체가 예술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맞은 세 번째 뒤통수였다. 여러분의 뒤통수는 안녕하신지.


그림을 보는 활동 말이야, 확실히 하기 쉬워요. 하지만 그런 활동으로 그림을 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해. 그냥,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거죠. (408p)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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