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 14. 살기 위해 지불한 시간

14. 살기 위해 지불한 시간들

by 김희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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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14. 살기 위해 지불한 시간들



작은 일상 하나에도 삶의 무늬가 비친다. 칫솔을 갈아 끼우는 일조차 그렇다. 한두 달에 한 번 칫솔 모를 교체한다. 같은 제품의 전동 칫솔을 쓰고 있어서 호환되는 칫솔모를 저렴하게 구입해 갈아 끼운다. 버리기 전에 반드시 모와 칫솔대를 분리하고, 치실과 치간 칫솔도 펜치와 가위를 사용해 플라스틱과 일반 쓰레기로 나누어 버린다.


언젠가 심리학 강의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는 건 환경에 좋은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긍심을 지키는 일이라는 말. 작은 쓰레기 하나를 제대로 버리겠다는 마음은 단순히 환경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존중하는 태도라는 이야기였다. 누가 보지 않아도 나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니까.


이번에 처음으로 ‘내 칫솔’을 기준으로 칫솔모를 교체했다. 그전에는 남편의 칫솔 모가 뻐드러지면 그제야 내 칫솔도 갈아주곤 했다. 늘 타인을 먼저 챙기고 나 자신은 뒤로 밀려 있었는데, 이번엔 내 칫솔이 먼저 닳은 걸 보고 새 칫솔을 구입했다. 작은 변화지만 이런 순간이야말로 내가 건강해지고 있다는 신호라는 생각과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존중의 회복’이 바로 이런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을 위한 루틴에서 나를 위한 루틴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사실은 회복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타인이 아닌 나로부터 시선이 옮겨지는 것이 일상에서 발견되면서 건강해졌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평소 청소나 집 정리를 할 때 심리학 강의를 듣는다. 집안일을 좋아하지 않아서 하고 싶지 않을 때(자주 하고 싶지 않다.) 강의를 들으며 움직이면 어느새 일이 끝나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지루하지 않고, 성장과 발전의 기쁨을 동시에 느끼면서 내 세상을 정돈하는 일상을 만들 수 있다. 어쩌면 감정을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것도 재활용을 분리하는 일과 닮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정을 제때 정리하지 않으면 쌓여 버린 재활용 더미처럼 나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오늘 칫솔을 교체하다가 문득 최명기 정신과 전문의 원장님의 강의가 떠올랐다. 한 환자가 우울증으로 1-2년간 수천만 원을 쇼핑에 쓰고 카드 빚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원장님은 “그 돈은 헛되이 쓴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지불한 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하지 않았더라면 삶을 붙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 또한 지난 3-4년을 ‘살기 위해 지불한 시간들’로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쇼핑, 여행, 타인 돌봄 등 얼핏 보면 낭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너지는 나를 붙잡아 주던 최소한의 방어기제였다. 내 안에서 느껴진 그 감각을 학자들은 ‘즉각적 감정 조절’이라고 부른다. 불안을 덮기 위해 몰두하는 방식이, 때로는 생명을 지켜주는 안전망이 된다. 물론 그 때문에 잃는 것도 있다.


나는 20대와 30대 중반까지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며 나 자신을 외면했다. 내 시간, 에너지, 돈을 끝없이 소모했기 때문에 정작 나를 돌보지 못했다. 칫솔 하나조차 남편의 기준을 따라야 내 것도 갈 수 있었던 그 패턴. 결국 내 내면을 회피하는 동안 나는 내 주권과 행복을 외부에 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던 날, 미뤄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를 집어삼켰다. 불안과 공포에 떨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생각들에 허우적대던 시간은 마치 재활용 더미 속에 빠진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생각도 재활용처럼 제때 분리수거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감정의 쓰레기통이 넘쳐 삶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지만, 그 시간들은 모두 ‘살기 위해 지불한 시간’이었다. 자격증 공부 같은 눈에 보이는 성과는 남기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 시간 동안 나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감사하다. 오늘 칫솔을 갈면서 남편 칫솔도 챙겨야겠다고 떠올린 나를 보며, 내가 견뎌낸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매일의 반복 속에서 고요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이제야 안다. 빨래, 청소, 쓰레기 버리기 같은 자잘한 집안일이 사실은 내 삶을 지탱하는 뼈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착 이론에서 말하는 내가 쌓아 올린 작은 루틴들이 곧 내 안전 기지가 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어차피 열심히 분리해도 수거하시는 분들이 뒤섞어서 버린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재활용 분리수거는 내가 나를 존중하기 위해, 나를 사랑하기 위해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누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내 마음 편하려고 하는 것이니 하던 대로 하기로 했다.


오늘이 되어서야 삶이 원래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오히려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마음대로 되지 않음 속에서 얻고 깨닫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지난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이제 그 시간을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어제의 나였다는 사실 그 깨달음 덕분에 든든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참 고맙다.



참고자료


1. Bowlby, John, 『A Secure Base: Parent-Child Attachment and Healthy Human Development』, Basic Books, 1988

→ 사용된 개념: 안전기지(Safe Base), 애착이론


2. Freud, Sigmund, 『The Ego and the Id』, W. W. Norton, 1923

→ 사용된 개념: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 불안 회피


3. Gross, James J., 『Handbook of Emotion Regulation』, Guilford Press, 2007

→ 사용된 개념: 즉각적 감정 조절(Affect Regulation), 자기 조절 전략


4. Kohut, Heinz, 『The Analysis of the Self』,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 사용된 개념: 자기 존중(Self-respect), 자기 돌봄(Self-care), 자기심리학


5. Pennebaker, James W., 『Opening Up: The Healing Power of Expressing Emotions』, Guilford Press, 1997

→ 사용된 개념: 감정 명명(Emotion Labeling), 자기 성찰(Self-reflection)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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