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라진 세계 / 1부. 경계

1부. 경계

by 김희경 작가



이 작품은 한 개인의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서사적 표현을 위해 가명, 합성, 변형의 과정을 거쳤으며, 실제 인물이나 단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인물·장소·관계·시점·상황의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보호를 위해 수정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다면 이는 우연입니다.


이 이야기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지칭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작품 속 해석과 관점은 서사적 구성과 인물의 심리적 흐름에 따라 전개되며, 현실의 사실을 단정하거나 일반화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 정서적 방임, 상실, 관계 의존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자는 자신의 안전과 감정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읽는 과정에서 불편함이 느껴질 경우 언제든 멈추어도 괜찮습니다.


이 작품은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기록이 아닙니다. 상처를 지닌 인물이 자신의 삶 안에 잠긴 문을 마주하고, 선택과 책임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이 서사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타인의 삶을 대신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능성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작은 단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라진 세계>



판타지 소설




AI 제작



AI 제작




AI 제작


[사진서체: 네이버나눔명조체]
[AI 컷 만화]

AI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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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경계

모든 세계에는 문이 있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타고 흐른다. 리안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있다.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리안의 눈빛이 붉어진다.


[이번 주말엔 꼭 내려와. 가족이니까 얼굴 보고 살아야지.]


리안은 한참 동안 그 문장을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가족이니까.” 그 단어가 유난히 또렷하게 눈에 박힌다. 가족. 리안은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본다. 낯설다. 누군가를 그렇게 불러본 적도, 그렇게 불려본 적도 없다.


“대체 왜 지금 와서?”


짧게 중얼거린 말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리안의 얼굴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숨을 타고 흘러나온다. 리안의 손 끝이 떨린다. 분노인지, 당황인지, 그리움인지 구분이 안 된다.


어릴 적, 다른 아이들이 부모를 기다리던 날이 떠오른다. 운동장 철문 쪽을 자꾸 바라보던 시선. 아무도 오지 않았던 오후. 해가 지고 나서야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가던 발걸음. 리안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전원을 끈다. 가방 안에 대충 핸드폰을 넣고, 강 근처 길을 따라 걷는다. 갑자기 리안의 얼굴 앞으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 아. 뭐야. 맞을 뻔 했잖아.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하늘이 맑아 구름도 없다. 리안이 몸을 숙여 낡은 책을 집어든다. 표지도 없고, 제목도 없는 먼지 묻은 갈색 표지. 손가락 끝으로 책을 집어 앞 뒤를 살펴본다. 누군가 오래 들고 다닌 것처럼 모서리가 닳아 있다. 잠시 망설이던 리안이 책을 펼친다.


- 낡은 책이네. 주인 없는 건가.


날이 좋아 하늘이 푸르고 맑은 봄볕이 흐르는 한 낮에 리안이 털썩 주저앉는다. 책을 무릎 위에 놓고 한참동안 책을 들여다본다.


책.


분주한 응급실.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20대 여성.


- 외상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식이 돌아오질 않습니다.

- 왜 못 깨어나는 거지?

-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리안의 눈이 가늘어 진다. 피식 웃으며 책을 덮는다. 남의 인생이다. 책을 열자마자 읽히는 글들에 리안의 얼굴이 붉어진다. 뭐야. 이 책 막장 세드 물이야? 어이없네. 리안이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난다.


- 아르바이트 늦겠다.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이 쌓여있다는 생각을 하며 리안이 급하게 걸음을 걷는다. 이럴 거면 점심이라도 먹으러 갈 걸. 리안이 천 가방을 어깨에 들러 메고 자리를 옮긴다.


저녁. 작은 원룸.


리안은 혼자 앉아 컵라면을 먹는다. 새우 그림이 그려져 있는 라면을 입에 넣으며 책상 옆 가방을 바라본다. 하얀 침대 위에 누워있는 20대 여자라. 왜 못 깨어나는 거지. 리안이 한숨을 내쉰다. 그 옆으로 이어졌던 문장이 떠오른다. ‘삶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문을 잠갔다.’ 문이라. 문득 리안은 다음 내용이 궁금해졌다. 책상 위로 손을 뻗는다. 모퉁이가 낡고 바랜 가벼운 책이 열린다.


- 도와줘.


리안의 눈이 커진다. 지금 뭘 들은 게 아니지? 뭐야. 어린 시절 불이 꺼진 닫힌 방에서 문을 바라보고 앉아있던 어린 리안의 모습이 떠오른다.


-도.. 도와줘.. 구해 줘..


뭐야. 책이 떨린다. 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책을 놓는다. 심장이 빨라진다.


- 미친 책이네.


리안은 오래 전부터 도와 줘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해도 신조차 손 한 뼘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리안은 도와달라는 말이 심장 안을 찌르는 듯한 느낌으로 들어왔다.


- 시간난 김에 읽어 보지 뭐. 어차피 할 것도 없었고.


침대 위에 누운 리안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여자가 불쌍하네. 리안이 한참동안 책을 파고든다. 왜 깨어나지 않는지 이해할 같아. 절반 가까이 읽은 책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리안이 천장을 바라본다. 쏟아지는 잠에 리안이 눈을 감는다.


꿈 속. 하얀 공간, 홀로 서 있는 남자.


물처럼 반짝이는 흰 대리석 위로 수백 권의 책이 공중에 떠 있다. 다채로운 빛깔의 문들이 여기 저기 보여지고, 은은하게 들리는 각자의 소리들이 문 밖으로 새어나온다. 무릎까지 내려온 희고 긴 가운을 입은 남성의 모습이 보인다. 흐르는 듯한 머리카락 사이로 남성의 눈이 아래를 향해 고정되어 있다. 신이 아주 공들여 만들었을 것 같은 느낌의 남자가 한참동안 흩어져있는 책들 사이에서 무언가 보고 있다. 리안이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긴다. 기척이 느껴지자 남자가 얼굴을 돌려 리안을 바라본다.


- 어? 너 뭐야?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 여기가 어딘데?


- 그게 왜 궁금하지?


- 아니, 그냥 니가 먼저 물어봐서 나도 물어 본거야.


- 경계다.


- 뭐의 경계?


- 세계와 세계 사이.


흩어져 있던 책들을 대충 모아놓고 남자가 리안 곁으로 걸어온다. 남자의 시선이 리안의 손에 들린 책으로 향한다.


- 그거 왜 니가 들고 있지?


- 몰라. 길 다가 주웠어.


- 그거 이리 줘. 네것이 아니다.


- 내가 주웠으니까 내 거지.


책 안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린다. 도와줘. 구해줘. 리안이 책을 툭 떨어트린다.


- 니가 왜 목소리를 듣는 거야?


- 몰라. 진짜 미친 책이네. 완전 막장 스토리던데.


- 그 책은 읽히지 않는다. 어떻게 읽었지?


- 글자로 써 있으니까 읽었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가 말을 잇는다.


- 그 여자 못 깨어나.


- 왜? 못 깨어나?


-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사람의 삶이야.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제 그만 나가.


- 무슨 말이야. 설명해 줘. 그리고 이거 그냥 소설 책 아니야?


- 너한테 친근한 대상물로 보이는 것뿐. 곧 끝나는 이야기야.


- 삶이라며. 오늘 끝난다니. 뭔 소리야? 여자가 죽는다는 거야? 크게 다친 것도 아닌 사고라며. 의식만 없는데 왜 죽어?


- 사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죽으면 죽는 거니까.


- 뭐야. 진짜 완전 막장 세드 엔딩 스토리네. 정말 거지 같이 끝나는 거잖아.


- 삶이라는 게 다 그래. 원래 완벽한 엔딩이라는 건 없어. 각자가 자기 삶 안에서 적당히 살다 마무리하는 거지.


- 거지 같아. 내 삶도 이렇게 끝나는 거 아니야?


- 어차피 인간 삶은 짧아. 금방 사라지지. 그러니까 너도 신경 끄고 언른 나가. 어차피 금방 끝나.


- 근데 넌 뭔데.


- 세계를 잇는 문지기.


- 네가 도와주면 되겠네. 도와달라고 불렀으니까.


- 나는 잇는 역할만 하지. 걔가 누군가를 불렀대도 할 수 있는 건 없어. 해서도 안 되고. 간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말이지.


- 내가 거길 갈 수 있어?


- ...


- 뭐야 말해줘.


- 갈 수는 있지. 꿈을 통해 세계를 이동하면 되니까. 꿈속에서 평생을 보낸대도 현실에서는 단 몇 분지나 있을 뿐일 거고.


- 그러면 내가 가서 도와주고 싶어.


- 굳이 들어가야 하나... 끝내고 싶어 보이던데.


- 너도 들었잖아. 도와달라고.


- 수많은 문들을 통과해야 해. 그 안에서 그 여자가 돼서 살아야 해. 그게 괜찮겠어? 남의 인생에 참견한다는 건 무거운 거야.


- 내가 가면 어쨌든 이 여자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거야?


- 바뀔 수는 있겠지. 규칙이 있어. 문장 한 줄을 바꿀 때마다 다른 문안에서 균열이 생겨. 누군가 사라지고, 기억을 잃고. 뭐든 대가가 따르거든.


- 괜찮아. 어차피 내 현실에서는 몇 분 사라지는 거라며.


- 너 자신조차 잊어버릴 수 있고. 그거, 생각보다 아프다.


- ...


- 간다고 해서 해결될까. 누구도 찾지 못할 공간 안으로 숨어버린 것 같은데 가능할까.


- 아무 것도 안하고 끝나는 것 보다는 낫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뭔가 해 보고 싶어.


- 책 놓고 나가. 괜히 엮이지 말고.


- 이것부터 해결해야 내 인생이 열릴 것 같거든. 느낌이 그래. 이대로 두고 나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 수많은 문들을 열어야 해. 그 안에서 뭘 잃게 될지 모르고.


- 상관없어. 내가 선택하고 싶어. 고작 몇 분인데 그 정도는 잃어도 상관없어.


- 자 이거. 문에 대기만 해도 열릴 거야. 안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시작돼. 그러면 멈출 수 없어. 시작되기 전에 빨리 나와도 돼. 다른 문으로 들어가도 되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고.


열쇠를 받아든 리안이 열쇠를 내려다 본다.


- 문제 생기면 뒤에 달린 피리를 불어.


- 근데 문이 많다며 어딜 들어가.


- 마음을 끄는 곳, 열어야할 것 같은 곳. 거기가 시작이야.


- 응, 저기 저 문 열고 나가면 돼?


- 하여간 인간들은..


뒤돌아 나가는 리안을 남자가 바라본다. 문 안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온다.


규칙 1: 이미 쓰인 사건의 문장 한 줄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한번 수정하면 다른 곳에서 균열이 생긴다. 누군가가 사라질 수 있고, 기억을 잃을 수 있다. 변경은 언제나 대가를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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