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고요히 머물게 하는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
그림책에서 '영혼'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궁금증으로 책을 펼쳐보았다. 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몇 장의 흑백의 그림들로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곧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침묵의 예고편이 끝나고는 빽빽한 글자가 한 면을 가득 채운 진행 방식이 흥미로웠다.
어느 날, 출장길의 호텔방에서 한밤중에 잠이 깬 남자는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속에 아무도 없는 느낌을 받은 남자는 덜컥 겁이 나서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남자에게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 분명히 환자분이 이삼십 년 전쯤 갔던 곳에 환자분의 영혼이 있을 거예요. 기다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요. 제가 드릴 다른 약은 없습니다.
영혼에 대해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을 풀어낸 글에 공감되어 피식 웃음이 났다. 상담실을 찾는 성인들 중에는 남자와 유사한 상태를 겪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 텅 빈 것 같은 공허감이 느껴지는 순간은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수 있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잃어버린 영혼> 그림책은 글작가와 그림 작가가 다른데, 글 작가인 올가 토카르축(Olga Tokarczuk)은 학부 전공이 심리학이니만큼 사람의 내면에 대해 관심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의사가 말한 대로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하여 그곳에 머무르는 시간을 갖는다. 꽤 긴 시간을 그려낸 것 같았다. 책에서 페이지 쪽수가 갑자기 건너뛰어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다.
오른쪽 페이지에서는 같은 공간에서의 장면이 책의 여러 장으로 이어지는데, 왼쪽 그림과 오른쪽 그림의 변화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왼쪽 장면은 영혼이 남자를 찾아오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오른쪽은 남자가 자신의 공간에 머무르는 시간을 상징이 담긴 오브제들의 변화로 풀어내고 있었다.
글 없는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하다 보니 어느새 그림책에 빠져들었다. 고요하면서도 노는 기분이 들었다. 요안나 콘세이요(oanna Concejo)의 그림은 집중하고 머물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림책을 덮고도 그림에서 느낀 여운이 오래 남아있어서 좀 신기했다.
마침내 창 밖에 한 어린아이가 찾아왔다.
사람이 어린아이와 만나면서 흑백의 장면들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한다. 남자는 자신의 영혼과 마주한다. 이 장면에서 '나의 영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각자 자신의 영혼에 모습이 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 보고 표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림책 초반에 나왔던 그림이 후반에도 반복해서 나오는데, 벤치의자 오른쪽에 엄마와 안겨있는 아이가 지워져 있다.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융(Jung)의 분석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청년기를 지나면서 남자는 무의식 속에 잠재된 여성성을, 여자는 남성성을 만나면서 통합으로 향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자기(self) 실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림책에서 남자의 영혼이 여자아이 같이 묘사되기도 했는데, 중년 남자가 자신의 여성성을 만나는 여정을 그려낸 것으로 읽히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자기다웠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되찾아가는 어른의 성숙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책을 보는 사람마다 발견하고 다가오는 의미, 느낌, 해석이 다를 것이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불현듯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느껴질 때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을 읽어보면 좋겠다. 나를 위한 쉼이 필요할 때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