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사자의 모든 글은 ‘소설 쓰기’를 기반으로 한다.
※ 당사자의 글은 정답이 아니다, 누구나 쓰는 방식이 다를 수 있고 글에 대한 철학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약간의 강압적인 표현은 당사자의 생각이 그만큼 확고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글쓰기가 일상 속으로 스며든 후부터 나에겐 게을리해서는 안 될 일이 생겼다. 바로 ‘읽기’다.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읽어야 할 글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당사자는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니, 소설을 읽어야 했다. 그곳에서 주제를 얻고 스토리텔링 방식을 배우고 매력적인 등장인물에 대해 공부했다. 전문적인 글쓰기 강의가 보편화되어있지 않은 지금, 책을 많이 읽는 것만큼 도움 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글쓰기에 효율적일까?
나는 원래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평생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당시에야 책 읽는 걸 즐겼지만 당시 어른들은 책을 읽는 나보다 공부하는 나를 더 선호했다. 책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였고 곧 그렇게 됐다. 그렇게 한 번 멀어진 책은 다시 가까워질 수 없었다. 자발적으로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았다. 사는 게 바빴고, 책 보다 흥미로운 일이 많았으며, 몇 시간씩 앉아서 독서를 즐길 만큼 정적이지도 못했다. 이랬던 내가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뒤부터 억지로라도 책을 읽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계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유로는 ‘배움’에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글쓰기 강의가 존재하지만 맞춤형 강의는 거의 없었다. 어느 글에나 통용될 수 있는 글쓰기 방법은 전문적인 강의와 거리가 멀었다.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 보고서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작가의 글을 읽음으로써 배우고 습득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철저한 시행착오를 거쳐 책을 냈으니, 그들이 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기본적인 지식은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쓰기’ 보다 ‘읽기’에 집중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책을 읽기 시작한 후로 나는 늘 이 고민에 빠져 살아왔다. 고민은 특히 끝내기 아쉬운 책일수록 더 깊어졌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은 가리지 않고 읽는 것이 중요하다. 단 한 번에 많은 책을 소화할 순 없기에 우선순위 정도는 고려해 볼 수 있는데,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먼저 <내가 쓰고 싶은 장르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소설을 쓰고자 했으니 소설을 읽는 당사자처럼 에세이를 쓰고 싶다면 에세이를 읽어야 피부로 와닿는 배움이나 깨달음이 있다. 소설을 잘 쓴다고 에세이, 칼럼, 수필 모든 장르를 아울러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이라는 게 다 비슷해 보여도 들여다보면 차이가 크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에세이는 모토가 ‘힐링’이므로 자극적인 단어와 문장을 기피하는 반면, 사회문제를 꼬집어 신랄하게 비판하는 칼럼의 경우는 완만한 단어를 사용했다가 혼란을 주기 쉽다.
다음으로 <닮고 싶은 책>을 읽자. 한 가지 장르의 책만 읽다 보면 유난히 마음에 드는 책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상관없다. 내 마음에 들기만 하면 되는데, 발견했다면 그 작가의 책은 전부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연도 별로 작가의 발전 단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은근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다. ‘작가라고 처음부터 다 글을 잘 쓰는 건 아니구나’ 하고. 또 <닮고 싶은 책>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책꽂이에 꽂아두고 틈틈이 다시 읽는 것이 좋은데,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수록 그 필체와 문장력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다.
<내 수준에 맞는 책>을 읽는 것도 글을 빠르게 배우는 방법 중 하나다. A라는 책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완벽에 가까운 A에는 100가지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내 수준이 낮으면 A를 읽어봐야 100가지 중 3~4가지 가르침만 파악할 확률이 높다. 운이 나쁘면 어떤 가르침도 얻지 못하는데, 다소 냉정하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이다.
그럼 글 수준이 낮은 사람은 좋은 책을 읽지도 말라는 거냐, 그건 아니다. 단순 재미만을 위한 게 아니라면 단계별로 차근차근 읽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아니면 100가지 가르침을 다 파악할 때까지 되풀이해서 읽는 것도 방법인데, 당사자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세 번, <넬레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두 번 읽었으며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는 여덟 번 읽었다. 복기할 때마다 감탄사가 나오는 걸 보면 작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직 한참 남은 모양이다.
잘 쓴 책과 못쓴 책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다
여러분들은 잘 쓴 책과 못쓴 책을 보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가? 세상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잘 쓴 책은 없고, 모두가 싫어할만한 못쓴 책은 없다는 뜻이다. 즉 어떤 책에서도 배울 점이 존재한다는 의민데, 내 기준에 <못쓴 책>이라 해도 바로 덮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덮어버린 책은 다시 들여다볼 확률이 매우 적고, 그럼 그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를 영영 배우지 못할 수 있다.
이런 말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좋은 음식을 잘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쁜 음식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글도 마찬가지다. 좋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쁜 표현을 피하는 것도 매우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나쁜 표현이라는 건 책 없이 스스로 깨우치기가 어렵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창작물은 언제나 사랑스러워서 충분한 객관성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당사자는 나쁜 표현을 <못쓴 책>에서 배우고 있다. <못쓴 책>을 읽음으로써 나쁜 표현이 무엇인지 깨달으면 그걸 삭제하거나 되풀이하지 않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당사자는 이런 책들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 반면교사란 따르거나 되풀이해서는 안 될 나쁜 본보기를 뜻하는데, 책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내 글에 적용시키지 않는 것만으로 글 실력을 급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 알아두면 좋다. 때로는 일부러 <못쓴 책>을 찾아 읽기도 한다. 이상하게 못쓴 책이 더 술술 잘 읽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거르고 싶은 책은 걸러라
앞서 말했듯 당사자는 <잘 쓴 책>에도 <못쓴 책>에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독하게 지루하지 않은 이상 끝을 보고야 마는 편인데, 그럼에도 거르고 싶은 책은 반드시 존재한다. 글을 쓰는 2년 동안 육십 권 정도의 책을 읽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지식이 퇴화하는 것 같아 덮은 책이 딱 한 권 있다.
<못쓴 책>을 선별하는 기준은 누구나 다르다. 어떤 사람은 스토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어떤 사람은 표현력이 부족해서, 또 어떤 사람은 캐릭터의 매력이 없어서 책을 덮었을 것이다. 당사자가 덮은 건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은 책이었다. 은어, 속어, 유행어, 외래어를 남발하는 책은 한없이 가벼워 보일 뿐만 아니라 작가의 노력까지 의심스럽게 했다.
사실 문장력이나 표현력, 스토리텔링, 캐릭터의 입체감 같은 건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발전 가능성이 있다.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는 건 이런 노력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작가들이 돌아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표준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유행어나 은어를 몰라서가 아니다. 전 세대를 아울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서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지키지 않는 작가가 과연 문장력, 표현력, 스토리텔링 등을 학습하고 연습할까? 그런 작가의 책은 더 읽어봐야 도움이 안 될 것이라 판단했고, 그래서 덮었다. 덮어버렸다.
여러분들이 무슨 기준으로 <못쓴 책>을 선별하는지, 덮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어떤 것들을 드는지 당사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읽고 있는 그 책이 정말 <못쓴 책>이 맞는지, 단 하나의 배울 점도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생각했는데도 마찬가지라면, 냉정하게 <못쓴 책>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면 덮는 것을 추천한다. 그런 책을 붙들고 굳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할 필욘 없지.
내가 마지막 장을 유난히 고집하는 이유
육십 권 정도를 읽으면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책이 당사자에게도 정말 많았다.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은 책만 <못쓴 책>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남의 글을 볼 땐 이보다 더 객관적일 수가 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이 수두룩 빽빽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덮지 않은 이유는…… 스토리텔링 때문이었다.
당사자가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게 200페이지 분량의 장편 소설 하나를 완결 낸 뒤였다. 그 소설을 쓰면서 내게 가장 취약한 부분은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아닌 스토리텔링이라는 걸 알았다. 타이밍 맞춰 사건을 풀어나가는 것, 순서에 맞게 갈등을 터트리는 것, 뿌린 떡밥을 회수하는 것, 이런 과정들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기승전결을 꾸려나가는지 궁금했고 이걸 알아내기 위해선 닥치는 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읽다 보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가별로 내용 구성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어떤 작가는 도입부에서 힘이 부족했다가 중간부터 힘을 받아 완벽하게 마무리해 내는가 하면, 어떤 작가는 도입부부터 명작 냄새를 풍기다가 중간쯤부터 그런 냄새가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럽게 했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책의 다양한 결말을 봐야 했다. 도입부부터 중간부를 지나 마지막 결말까지. 책마다 각자의 강점이 다르니, 전부 흡수하려면 중간에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은 도입부를 잘 쓰는 작가는 많아도 결말을 잘 쓰는 작가는 흔치 않다는 것.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관련된 웹검색이 늘었다. 나도 편법으로 글을 배우고 싶어 인터넷을 참 많이도 뒤졌더랬다. 그러다 보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문장이 있는데, ‘책을 읽지 않아도 글은 쓸 수 있다’이다. 글을 쓰고 싶어 책을 읽는 나에게 이 말은, 어느 방면으로도 공감이 안 된다.
쓸 순 있다. 글 쓰는 거,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다. 빈 페이지에 타자 몇 번 두드리다 보면 글은 써진다. 하지만 이런 아무나 쓰는 글 말고 나만의 글,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하는 명작을 쓰고 싶다면 책을 읽는 게 맞다. 글을 쓰는 것보다 읽는 게 훨씬 쉬운 노력인데, 왜 이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쓰는 건 내 실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지만, 읽는 건 확인이 어렵기 때문일까? 우리는 왜 이렇게 읽는 것을 싫어할까, 가끔은 궁금할 때가 있다.
❋ 2023.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