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확장된 실체, 타자의 보충물, 그것은 현대적 공간이기 때문에 쉽게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순수한 정신, 즉 순수한 공간의 실체. 우리는 그것이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순수한 공간은 부분의 개념에 기초를 두지만, 다음을 추가해야 합니다. 즉, 모든 부분들이 외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 '부분은 부분 외부에 존재한다'. (역자 주 : 라깡은 계속 실재와 존재론을 끌어와 무의식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이 대목은 주체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부분들이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외부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작은 것들을 이끌어낼 수 있으나, 진지하게 다음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여러분을 떠나기 전 제 기표를 설정하기 위해, 지난번 제 첫 문장의 시작에 있었던 '신체의 주이상스'를 숙고하는 것을 제안드립니다. 이 신체는 대타자를 상징화하며, 또 다른 형태의 실체, 즉 '향유하는 실체(substance jouissante)'를 정립하게 만드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적 경험이 가정하지 않나요? 신체의 실체가 향유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만 정의된다는 조건 하에 말입니다.
이것은 기표적 방식으로써만 신체화해야 향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확장된 실체의 '부분은 부분 외부에 존재한다' 이외의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주의자였던 사드가 놀랍도록 잘 강조했듯이, 우리는 타자의 몸의 일부만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한 몸이 완전히 둘러싸여 타자의 몸을 포함하고 흡수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작은 포옹으로, 이렇게, 한쪽 팔이나 다른 무엇이든 잡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 아야!
향유는 요컨대 타자의 몸의 일부를 즐기는 자의 몸이라는 근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도 향유합니다. 이것은 대타자와 어느 정도 비슷하지만 그가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방금 묘사한 것을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는 모든 기표의 모호성을 담고 있는데, '신체를 향유하는 것(le jouir du corps)'은 사드적인 뉘앙스를 지닌 소유격을 포함하고 있으며, 내가 강조한 바와 같이, 또는 반대로, 주관적이고 황홀한 뉘앙스를 지니고, 결국 대타자가 즐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이상스에 관한 것은 기초적 수준에 불과합니다. 지난번에 저는 사랑이 증상이 아니라고 말했지요. 이것이 지속되어 우리를 팔루스적 주이상스의 수준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다른 한편으론 상징화되면서 대타자의 주이상스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 즉 내가 표현해야 할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