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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실수 : 혀가 미끄러짐

후기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너만 두려운게 아니야”
“두려워요? 내가 뭐가 두려워요”
“그럼 선배님은 뭐가 두려운데요?”
“사는게, 다. 너처럼 스스로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두려워서 얻어낸게 뭔데요?”
“너처럼 치기로 아무 글이나 갈겨써서 챙피한줄도 모르고 남 앞에 내놓고 싶진 않아!”
“알았어요. 나도, 누구처럼 평론가들한테 알랑방구껴가지고, 이거 베스트 셀러 만들고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이 자식이, 너 그것밖에 안 돼 이자식아?”
“내가 뭘!”
“이 자식이 말 조심해. 나 너 선배야!”
“선배는 니미”


혀가 미끄러졌다, 뜻하지 않은 말실수를 해명하기 위해 좋은 핑계다. 해서는 안 될 말, 혹은 하지 않으려 했던 말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기표들이 따라붙는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요,...' 구태여 핑곗거리가 필요 없는 실수였다면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도 한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 적확한 단어로써 표현하고자 했던 그것이 아닌 다른 게 튀어나왔다는 게 새삼 곱씹을수록 신기한 일이다. 한편 정신분석이 던지는 근본적 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혀는 왜 미끄러졌는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혀는 미끄러진다.'


일상담화는 카메라 화면같이 비추는 부분만을 드러낸다. 이마저도 과찬이라고 할 법한 게, 실제 영화 장면마다 우리가 주목하는 요소는 극히 정해져 있다. 때문에 대작영화가 끝나고 나서 '당신이 몰랐던 영화의 n가지 옥에 티!(혹은 디테일)' 같은 영상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일상담화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말하면서 의도라고 부르는 그것, 꼭 말해져야만 했고 그것 외에는 다른 의미란 없을 것처럼 여기는 그것은 사실 카메라 화면에 잡힌 극히 일부의 요소에 불과하다. 100년밖에 안 된 무의식의 개념이 자리 잡은 지금 이러한 지적도 진부하기만 하다. 그에 대한 '왜'와 같은 대답도 그다지 신기할 게 없어 수많은 자기 계발서적에 자기 좋을 대로 써놓은 게 현실이다.


따라서 '혀가 미끄러졌다'는 현상 자체보다는 그 뒤에 따라붙는 변명이 내겐 더 흥미롭다. 실수를 자각하고 이어 붙이는 설명, 정상성으로 다시 기어오르고자 하는, 애타는 몸짓.


가령 일상 속 말실수의 (다소 작위적인) 예시로 직장 상사한테 혼나던 와중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욕이 나왔다고 해보자. '씨발...' 그리고는 상황 설명이 이어진다. '팀장님 그게 아니고요, 사실 제 어머니가 얼마 전에 수술하셔서 너무 답답한 마음에 화가 쌓여 있었나 봐요' 같이 터무니없는 변명 말이다. 변명이 얼마나 말이 되든 아니든, 결국 말실수는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단 식으로, 혹은 아예 없었던 일로 해달라는 식의 해명 내지는 부탁이다. 하지만 말실수를 없던 것처럼 취급하고 넘어가든, 정상성 안으로 욱여넣든, 결국 일상담화가 보증하는 범위 내에서는 말실수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는 하나같이 실수투성이다. 선배에게 대들고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는가 하면, 아내가 신경 쓰이면서도 다방 여자를 끌어안는 남편,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 외치는 여인, 횡설수설 무명작가에게 유명작가가 아닌지 묻는 가게 사람, 그 밖에도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긴가민가한 여러 대사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변명하지 않는다. 기가 막히게 이상한 말들을 던져놓고서 핑계가 따라붙는 법이 없다. 그래서 더 기이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전혀 정상적인 대화가 생각하지도 못한 뜻밖의 장면에서 이어지는데 그 맥락에 대한 해명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재가 효섭의 외도를 목격하고 효섭이 적반하장으로 화를 낼 때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너 코 묻은 돈으로 선물 샀니? 너 왜 이렇게 날 죽이려고 하니? 집에 가서 그 더러운 곰인형 끌어안고 자! 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개 같고 똥이야! 넌 내가 아니야.'


대체 뭘 죽이려 하고 한단 말인가. 개 같고 똥 같다는 말은 앞서 종업원이랑 과선배들에게 병신이니 뭐니 했던 욕설이 비하면 욕같이 들리지도 않는다. 마지막 말, 넌 내가 아니라는 대사는 도통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령 이런 식의 이상한 대사들에 각각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 조잡한 영화 해석을 내놓은들 그거야말로 큰 의미가 없다. 홍상수 감독의 다른 작품 촬영 비화를 들어보면, 배우가 계획에 전혀 없던 램프를 가져왔더니 그 램프가 없었더라면 영화 스토리가 안 이어질 뻔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만 들어봐도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의 이질성, 그건 메시지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실수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말실수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혀가 미끄러져 뱉는 말은 '의미가 없다'는 의미만이 있다. 바디우가 말했던 공백(vide), 없는 것이 들끓고 있다는 테제에 농담은 명확한 예시가 되어준다. 이로써 드러나는 의미의 외연이란, 말실수에 달라붙는 핑계, 그리고 그와 실상 다를 바 없는 우리 일상이 존속될 수밖에 없는 구차한 이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무의미성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전개되는 우연성이 한편 자연스러워 보이듯, 정상성이 지탱하는 일상은 비정상성으로 역전된다. '저렇게 살아도 살아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에서 정상성의 범주란 도리어 의문의 대상이다.


왜 굳이 이런 삶인가?


미끄러진 삶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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