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사랑의 글자(une lettre d'amour)
방금 제가 여러분께 칠판에 쓴 내용을 보고 여러분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사회적 연대가 기반을 두고 있다고 예시했던 네 가지 담론의 표기에서, 지식을 S2로 기호화한 그 지식에 대해 말입니다. 어쩌면 저는 이 S2가 S1이라는 순수 기표에 대한 부차적인 위치를 넘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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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기호화를 칠판에 제시하기로 결정했으니, 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내용은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았고 어디에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이것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늘 그렇듯이, 예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분석가 담화는 의미를 목표로 합니다. 그 의미에 대해, 저는 각자가 흡수하고 있는 것만큼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살아가는 의미의 한계에 의해 규정됩니다. 이는 그 의미가 멀리 가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분석가 담화가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 의미가 허상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분석가 담화가 그 의미가 성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 한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 말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단어(mot)가 동작(motus)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입니다. 라 퐁텐(La Fontaine)은 "대답 없음(pas de réponse), 단어(mot)"라고 어딘가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의미는 실패하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너무 성급히 이해하는 것을 피해야 하며, 이는 그리스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φρονησις(프로네시스, 신중함)’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모든 신중한 주의를 포함합니다. 그리스어로 많은 것들이 이야기되었지만, 이는 분석가 담화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습니다. 이제 칠판에 적힌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네 개의 명제 공식이 있습니다. 칠판 위쪽에 두 개는 왼쪽에, 두 개는 오른쪽에 있습니다. 말하는 존재는 어느 한쪽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왼쪽의 하단에 있는 ∀xΦx는 남성이 전체로서 그 자신의 표기를 팔루적 기능에 의해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단, 이 기능은 Φx를 부정하는 x의 존재, 즉 ∃xΦx̄에서 그 한계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기능 -’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Φx라는 명제가 부정을 통해 도출되며, 이는 성관계를 대신하여 거세를 통해 이루어지는 실행을 근거로 삼습니다. 성관계는 결코 명시적으로 기록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Φx가 완전히 부정되는 것으로 설정된 예외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말하는 존재 중 여성의 부분에 해당하는 표기가 있습니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듯이, 남성성을 나타내는 속성을 가졌든 아니든, 모든 말하는 존재(역자 주 : 아마 '말존재'와 '말하는 존재'로 여태 혼용하여 번역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는 순전히 제 번역이 미숙한 탓으로, 이하 'l'être parlant'은 말하는 존재로 번역하겠습니다.)가 이 부분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속성은 여전히 규정되어야 할 요소들입니다.
만약 이 부분에 자신을 위치시킨다면, 이는 보편성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부가 아님(pas-tout)’로 존재하며, Φx 안에 자신을 두거나, 그 안에 속하지 않을 선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언어를 사용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들에서 이른바 남성 또는 여성에 해당하는 부분의 유일한 정의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성적 동일시로 나뉜다고 잘못 표현되는 인간성을 수직적으로 나누는 선과 교차하는 가로선 아래에, 그것과 관련된 내용을 강조한 표기를 볼 수 있습니다. 남성의 측면에서, 저는 여기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를 특권화하려는 의도가 없이, $(빗금친 S)와 그것을 지지하는 기표로서의 Φ를 기재했습니다. 이는 또한 모든 기표 중에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기표인 S1로 구현됩니다. 이 S1은 의미와 관련하여 실패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부분적 의미(le mi-sens), 무의미(l'indé-sens)"의 전형적인 사례이며, 또는 "억제된 의미(réti-sens)"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중화된 $는 궁극적으로 그 자신이 의존하지도 않는 기표와 함께하며, 파트너로서 항상 막대의 반대편에 위치한 대상 a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적 파트너인 대타자(l'Autre)에 도달하는 것이 허용되는데, 이는 오직 그가 자신의 욕망의 원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 점에서, 제가 다른 그래프에서 $와 a의 결합으로 표시한 바와 같이, 그것은 다름 아닌 환상(fantasme)입니다. 이 환상은 주체가 사로잡혀 있는 곳이며, 이는 프로이트 이론에서 명시적으로 ‘현실 원칙(principe de réalité)’이라고 불리는 것을 지지합니다.
이제 반대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올해 다루고자 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명백히 다뤄지지 않은 채로 남겨둔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Was will das Weib?)"라는 질문입니다. 프로이트는 오직 남성적 리비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결코 무(無)가 아닌 하나의 영역이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역은 여성을 자신의 지위로 받아들이는 모든 존재에 해당합니다. 다만, 이러한 존재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더욱이 여성을 "la femme"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강조했듯이, "la femme"의 "la"는 ‘전부가 아님(pas-tout)’으로 표현되는 순간부터 명시적으로 기록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la"는 가로줄이 그어진 형태로만 존재합니다. 이 La(/) (La barré)는 가로줄이 그어진 A(/)라는 기표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를 설명드리겠습니다.
대타자(L'Autre)는 단순히 진리가 더듬거리며 표현되는 장소가 아닙니다. 대타자는 여성이 근본적으로 관계를 맺는 대상을 대표할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산발적인 증언들만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그것들을 은유의 기능으로 다룬 것입니다. 성관계에서, 무의식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관련하여, 여성은 근본적으로 대타자와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제가 더 가까이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성은 대타자의 기표와 관계를 맺습니다. 대타자는 대타자로서 항상 대타자로만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말했던 “대타자의 대타자는 없다”는 진술을 떠올릴 것이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타자는, 모든 기표가 표현될 수 있는 곳으로서, 그 근본에서 근본적으로 대타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표는 열린 괄호와 함께 대타자를 가로줄이 그어진 형태S(A/)로 표시합니다.
대타자가 생물학적 비율로 대략 절반에 해당하는 말하는 존재들의 한쪽이 참조하는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바로 이것이 La(/)에서 출발하는 화살표로 칠판에 적힌 내용입니다. 이 La(/)는 말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여성을 두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여성은 S (A/)와 관계를 맺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녀는 이중화되고, ‘전체’가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Φ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Φ는 우리가 팔루스(phallus)라고 부르는 것으로, 저는 이것이 의미를 가지지 않는 기표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는 남성에게서 팔루스적 향유(jouissance phallique)를 지지하는 기표입니다. 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실천에서 자위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강조하며, ‘바보의 향유(jouissance de l'idiot)’라고 불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