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파니(Epiphanies)

by. 캐터린 미요(CATHERINE MILLOT)

by 숨듣다

에피파니는 조이스 작품 세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것은 조이스적 우주의 ‘중력 중심’이면서 동시에 ‘블랙홀’로, 작품의 핵심에 자리한 근본적인 무의미(radical non-sens)를 표시합니다. 라인 강 유파 신비주의에서 즐겨 쓰이는 Ungrund(‘근거 없는 근거’)라는 용어를 빌려, 그 기능을 ‘바탕이 없는 기초’라 부르고 싶어집니다. 『율리시스』에서 조이스가 “부성의 신비”를 논하면서 이러한 구조를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적인 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신비 위에, 그리고 이탈리아의 간계가 서방 세계의 대중에게 미끼로 던져 준 마돈나 위가 아니라, 교회는 세워졌으며, 그리고 세워져서 흔들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처럼—대우주(macrocosme)와 소우주(microcosme)처럼—‘공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에피파니는 조이스의 가장 초기 산문 텍스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R. 엘먼(R. Ellmann)에 따르면, 조이스가 그것들을 단순히 ‘산문시(Poèmes en prose)’라고 부르지 않고, 전례(典禮)에서 차용한 이 기이한 용어로 명명한 것은, 남들과 똑같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들은 시가 아닙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검은 운석처럼, 그 매력은 시적 가치라기보다 오히려 수수께끼 같은 성격에 있습니다.


이 텍스트들은 대부분 대화의 단편 형태로 제시됩니다. 조이스는 그것들을 그대로 출판하지 않았지만, 이후 자신의 작품인 『스티븐 히어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 등에 일부를 삽입했습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단절 없이 서사의 조직 속에 녹아들어, 작가가 부여한 특별한 기능이 있는지조차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는 눈치채기 어렵습니다. 맥락 속에서는 의미를 부여받지만, 원래 그것들을 한데 모아 적어둔 필사본에서 순서대로 읽으면, 오히려 그러한 의미가 현저하게 결여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에피파니 모음집은 조이스에게 있어, 자신의 작가적 소명을 확신하게 해준 어떤 시원적인 영적 경험의 흔적이자 증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바로 거기에서,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자만으로 보였던,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확신을 끌어냈습니다. 예이츠(Yeats)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렇게까지 근거 없이 뻔뻔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조이스는 『율리시스』에서, 자신이 그들에게 부여했던 중요성을 스스로 아이러니하게 언급합니다.


“당신의 초록색 타원형 종이에 쓴 에피파니들을 기억하시오. 불가해한 사색들, 죽을 경우 전 세계의 모든 주요 도서관—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포함해—에 보낼 사본들.”


이는 실제로 1902년에 조이스가 그의 형 스태니스라스(Stanislas)에게 했던 부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로, 이 짧은 텍스트들에 그가 부여했던 가치와, 그들이 지닌 환기 능력의 빈약함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간극이 존재합니다.


조이스 자신이 흔쾌히 ‘황홀한(extatique)’ 경험이라고 부른 내적 체험의 증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독자에게 그 체험의 개념조차 전혀 전달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그 속에서, 조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소한 일상의 헛된 기록’ 정도밖에 보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품고 있는 근본적인 무의미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 불일치는 에피파니 특유의 수수께끼를 형성합니다. 실제로, 내적 체험이 그 자체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들은 시적 경로를 통해 그러한 체험을 일정 부분 전달하는 데 성공해 왔습니다. 그렇게 발생한 의미의 효과들은, 그러한 전달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시도가 지닌 높은 환기력과, 그로 인한 성공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조이스의 에피파니는 이 점에서 하나의 실패를 보여줍니다. 왜 실패했는지를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그것들이 영적 사건의 흔적이라면, 그것들은 그 사건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잔여물, 폐기물에 가깝습니다.


조이스와 신비주의자 사이에 다음과 같은 경험의 공통점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어떤 실재(le Réel)와의 조우입니다. 이 실재는 그 자체로 불투명하며, 의미에 저항하고, 부인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이전의 모든 체험과 급진적으로 이질적인 상태로 주체에게 외부로부터 찾아옵니다. 이러한 사건은, 각자가 주체로서의 자리를 지키는 ‘말들의 조직(tissu des dires)’ 속에 상징화되어 통합될 것을 요구합니다.


신비주의자는 이러한 경험을 종교적 담론 속에 기입하여 의미를 부여하려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체험의 언제나 고유한 특수성은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자신이 속한 담론 속에서 새로운 표현을 발명해,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이 특수성을 전달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비주의자들은 시인의 작업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은유를 창조해, 그 실재를 대신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가 본래 그 실재에 대해 닫혀 있는 이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작업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의미 창조라는 은유의 작업을 공유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인 역시 ‘환원 불가능한 실재’를 상징화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시인과 종교인에 대해 소명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소명은 실재와의 조우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상징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는 ‘타자’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주체에게 요구이자 선택(선발)으로 체험됩니다.


블랑쇼(Blanchot)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원초적 장면(scène primitive)」이라는 제목 아래, 작품의 기원(origine)에 해당하는 그러한 조우의 경험을 서술한 뒤, 그것의 포로가 된 아이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그는 이제부터 비밀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 비밀은 다른 모든 비밀과 마찬가지로, 고백을 향해 밀어붙입니다. 그리고 작가를 “자신의 위치에 관한 수수께끼를 해독하는” 과업에 고정시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조이스는 에피파니에서 이러한 사건에 대한 어떠한 은유도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기억을 담지하지 못한 이정표나 경계석과 같은, 환유적인 잔여물로 보입니다. 마치 말 없는 폭발의 어두운 파편들처럼, 그 속에는 어떤 새로운 의미도 흐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짧은 장면들, 대화의 단편들은, 불가해한 것을 증언하기에는 ‘보이지도 않고 쓸모없는 목격자’처럼 보입니다.


조이스가 에피파니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밝힌 것은, 『스티븐 히어로』, 즉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첫 번째 초고에서입니다. 그는 그 예로, 더블린의 한 거리 모퉁이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의 단편을 들고 있습니다. 조이스 자신이 ‘사소한 사건’이라 부른 이 장면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유혹하는 여인의 빌라넬(Villanelle de la tentatrice)」의 ‘격정적인’ 연을 탄생시켰습니다.


한 소녀가 집 계단 위에 서서 한 청년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소녀(은근히 늘이는 목소리로) : “아, 네… 나는… 예배… 당에… 갔었… 어.”
청년(작게) : “나… (여전히 작게) : 나…”
소녀(부드럽게) : “…아… 하지만… 당신은… 참… 나… 쁘… 네요…”


에피파니는 이러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웅 스티븐(Stephen le Héros)’은 그것을 기록하고 소중히 간직하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합니다.


“그가 에피파니라고 부른 것은, 말과 몸짓의 속됨을 통해서, 혹은 마음 자체의 기억할 만한 어떤 국면을 통해서 드러나는 갑작스러운 영적 발현이었다.”


에피파니는 조이스의 미학적 구상, 그리고 작가의 소명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작가의 임무는 그것들을 기록하는 것이며, 그것들은 “가장 섬세하고 가장 덧없는 순간들”을 대표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영적 발현으로서의 에피파니는 아름다움의 세 번째 특성인 클라리타스(Claritas)에 해당합니다. 조이스는 이를, 대상의 ‘퀴디티(quiddité, 본질적 무엇임)’가 마치 백열(白熱) 상태로 치솟아, 궁극적인 발광 지점에 도달하여 그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으로 이해합니다. 대상이 에피파니를 통해 발현될 때, 그것은 갑자기 “자신이 바로 그것임—그의 퀴디티가 외양이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우리 앞에 한 번에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여러 지점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사소한 사건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존재에 관한 한 계시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는 바로 이러한 사소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마치 주현절 날, 겉보기에 보잘것없는 포대기에 싸인 아기 속에서 ‘로고스’가 드러나는 것처럼.) 나아가, 이는 조이스의 작가적 소명을 확립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에피파니의 사소함은 무의미에까지 닿아 있습니다. 우선, 사건의 맥락이 삭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본질적인 이유는, 인용된 문장들이 매우 자주 중간에서 끊겨 있어, 의미의 ‘완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에피파니가 이러한 무의미의 효과를 만들어내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스티븐 히어로』에서 스티븐은 더블린 거리를 거닐며, 우연한 만남 속에서 들은 천박한 말들을 마치 숨겨진 보물처럼 모았습니다. 그는 이런 평범한 문장들을 반복해서 되뇌며, 그 속에서 평범하고 공허한 의미를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서 의미의 심장, 의미의 자리로 파고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조이스는 분명 이것을 언어를 정화하는 작업으로 보았습니다. 말라르메(Mallarmé)와 마찬가지로—그러나 다른 방식으로—그는 의사소통이라는 실용적 사용에 의해 타락한 언어의 본래적 존재를 순수하게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조이스가 자주 참조한 셸리(Shelley)의 『시 변호(Defence of Poetry)』도 이와 유사한 개념을 전개합니다. 작가는 일종의 ‘언어의 구원자’인 셈입니다.


‘자명함’, 즉 의미의 일상적 평범함은 “지옥 중의 지옥”이며, 그것으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벗어나야 합니다.


에피파니는 이렇게 의미를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정화 작업의 잔여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작업의 한쪽 면일 뿐입니다. 다른 한쪽 면은, 사소함으로부터 계시가 솟아오르는 ‘역전’입니다. 무의미에 가까웠던 것이, 갑자기 충만함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에피파니는 한편으로는 텅 비어 있고 완전히 하찮고 덧없고 불안정한 의미를 가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으로 밀도 있는 의미—형언할 수 없고, 전달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조이스는 바로 여기에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기초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슈레버(Schreber)의 두 가지 환각 유형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는 끊어진 문장들에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근본언어(Grundsprache)’의 요소들—즉, 그 의미가 완전히 수수께끼 같을수록 오히려 더욱 충만한 의미를 농축하고 있는 단어들—에 해당합니다. 이 두 극단은 언어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점이며, 상징계가 실재에 닿는 지점입니다. 이때 실재는 의미에 대한 ‘추방’, 심지어 ‘혐오’입니다. 라깡이 말하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발화에서 의미를 비워내며,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실재의 차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제거된 의미는, 주체를 끝없이 질문에 사로잡히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의미의 형태로, 일종의 귀환을 통해 실재 속에 돌아옵니다. 이러한 점에서 에피파니 텍스트들은 일종의 신조어, 또는 근본언어의 어휘처럼 기능합니다.


바로 이 근본언어를 창조하는 데 조이스는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 작업의 정점이 『피네건의 경야』이며, 이 작품은 에피파니가 이미 보여주고 있던 구조를 완성합니다. 조이스의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들은, 에피파니와 마찬가지로, ‘의미의 과잉’과 ‘의미의 비움’이 결합한 것입니다. 영어의 동음이의어에서 비롯된 말장난뿐 아니라, 쓰기와 읽기, 문자와 음소 사이의 놀음, 그리고 다언어적 동음이의(homophonie translinguistique)를 통한 언어 간 전환은, 의미의 무궁무진한 중의성을 바탕으로 의미의 과잉을 낳습니다. 그러나 이 과잉은 곧 무의미로, 나아가 순수한 비가독성으로 전환됩니다. 텍스트는 ‘비워진 의미로서의 문자’라는 실재로 축소되며, 이 비움이 바로 조이스의 향유(jouissance)의 토대가 됩니다.


그의 작업은,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는 하나의 단어, 즉 절대적인 의미를 붙잡을 수 있는 ‘형언 불가능한 기표’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피네건의 경야』에 나오는 유명한 백 자짜리 단어들은 그 극단에 해당합니다. The hunderedlettered name again last word of perfect language—완전한 언어의 최후의 단어. 궁극적인 ‘마침표’에 대한 열망은, 곧 수수께끼 같은 의미의 충만함을 기표화할 무언가를 찾는 탐구와 하나로 합쳐집니다. 조이스가 쓴 Name(이름)은 발음할 수 없는 이름으로,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이름처럼, 단순한 트림소리나 천둥소리로 환원됩니다. 그 천둥소리는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을 대리하는데, 조이스의 예술 전체는 바로 그것의 ‘위조(forgerie)’입니다.


에피파니라는 내적 경험과 『피네건의 경야』에 이르는 조이스의 글쓰기 작업은, 상징계와 실재의 ‘매듭짓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상상계의 차원이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말실수이든 장치이든) 제거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런 상징계와 실재의 매듭짓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에피파니와 글쓰기는 모두 ‘증상(symptôme)’으로 위치지을 수 있지만, 구조 속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습니다. 라깡이 『조이스에 관한 세미나』에서 제시한 보로메오 매듭을 참조하면, 상징계의 원과 실재의 원을 첫 번째로 묶는 것은 상상계의 제3의 원을 “잘 익은 과일이 부드러운 껍질을 벗어버리듯” 떨어뜨리는 에피파니 경험에 해당합니다. 반면 글쓰기는, 첫 번째 매듭에서 풀려난 상상계를 두 번째 매듭에서 상징계와 실재를 다시 묶으면서 포함시킵니다. 글쓰기는 이렇게 RSI(상징계-상상계-실재)의 매듭을 복원합니다.


조이스는 ‘아버지의 결여’를 감싸는 대신 그 결여를 반복(즉, 아버지의 실패를 선택)함으로써, 그리고 그 오류를 이단적으로 두 배로 확증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을 통해 적절한 매듭짓기를 수행합니다. 그는 ‘증상(에피파니)’에서 ‘증환(sinthome, 조이스적 매듭)’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에피파니의 ‘사소함’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사소함의 성질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인용되는 말들은 종종 여성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조이스가 보기에는, 이러한 에피파니의 사소함은 여성이 지닌 ‘우매함(bêtise)’—즉, 한편으로는 남성과 그의 욕망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에 대한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우매함—을 특징짓습니다. 여기서 사제라는 인물상이 중심에 있습니다.


이를 번역하자면, 여성의 우매함이란 ‘전부가 아닌(pas-toute)’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는 여기서 ‘한-아버지(Un-père)’의 자리를 차지하고, 조이스는 아일랜드 여성(심지어 아일랜드 자체)의 사제에 대한 겉보기에 복종적인 태도를 폭로합니다. 그는 이를 위선적 복종이라 보며, 실제로는 종교에 대해 본능적으로 무관심한 태도의 가면이라고 봅니다.


여성의 우매함—이를테면 몰리 블룸(Molly Bloom)의 경우—은, 실재가 무법(無法)인 것처럼, ‘법 밖에 있는’ 면모입니다. 그녀들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 그리고 욕망에 대한 관계(즉, 남근기능의 범주에 속하는 것)는 순전히 편의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매함이란, 여성이 남근과 맺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완, 심지어 비겁함이며, 욕망에까지는 이르지 않는 결여의 공백입니다.


T. S. 엘리엇이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인용한 구절 When lovely woman stoops to folly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남자의 욕망이라는 어리석음에 몸을 굽힐 때… 모든 것이 끝나고, 그녀가 홀로 남았을 때,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축음기에 레코드를 건다”는 것입니다.


에피파니 속 우매함은, 가장자리에서 기능하는 남근 기능이 무너지는 지점, 즉 ‘가짜 외양’이 파열되는 곳에서 드러나는 심연을 열어젖힙니다. 이 우매함은, 기표화 불가능한 향유의 실재로 통하는 열린 창이며, 몰리-노라(Molly-Nora)는 그 대표적인 형상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여인은 ‘자비를 잃고(décharite)’, 유혹자가 되어, 자신의 향유의 심연 속으로, 티레시아스(Tirésias)처럼 그것을 엿본 이를 빨아들입니다.


여성은, 중상(中傷)당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더럽기(immonde)’ 때문입니다. 실재처럼, 여인은 ‘세상(monde)’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이스-티레시아스는 ‘여성(La femme)’을 믿습니다. 즉, 신앙도 법도 없이, 남근 기능 바깥에 전부(Toute) 놓여 있는 ‘완전히 다른 존재(Toute Autre)’로서의 여성을 말입니다. Das Weib, 완전히 건강하며, 전적으로 비도덕적이고, 수정 가능하며, 신뢰할 수 없고, 매혹적이며, 영리하고, 한정적이고, 신중하며, 무관심한 존재. Ich bin das Fleisch das stets bejaht—“나는 언제나 ‘예’라고 말하는 육체다.”


이 갑작스러운 계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클라리타스(Claritas)이며, 이는 사물의 ‘퀴디티(quiddité, 무엇임)’가 돌연히 솟아올라, 거의 환각적인 광휘로 발산하는 실재의 출현을 뜻합니다.


성 바울로의 서간에서, ‘에피파니’는 ‘파루시아(parousie)’와 동의어입니다. 즉, 지각의 장 안에서 신성(神性)이 현현하는 것이며, 가시적인 것으로 변한 신성을 드러내 보이는 계시이자, 동시에 ‘로고스’가 ‘말씀’이 되는 사건입니다.


에피파니는,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의 장’ 안에 출현하는 것으로서, 플라톤 및 신플라톤주의의 ‘이미지’ 이론과 연결됩니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미지는 그것이 드러내는 ‘이데아’와 유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 이미지는 존재의 발산, 신성의 발광입니다. 얌블리코스(Jamblique)는 신들이 그들의 광휘와 빛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미지의 형태로 육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에피파니라는 개념에는 이러한 ‘광채’와 ‘밝음’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어원적으로도, 에피파니는 별이 떠오르는 것, 빛의 출현과 연결됩니다.


클라리타스는 예술가가 ‘미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바로 그 순간에 해당합니다.


“이 최고의 아름다움의 성질, 즉 미적 이미지의 맑은 광채가, 방금 전까지는 대상 전체(integritas)에 머물러 있던 정신이 그 조화(consonantia)에 매혹되며, 밝게 포착되는 순간—이는 미적 쾌감의 빛나는 정지 상태이며, 셸리(Shelley)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표현으로, 이탈리아 생리학자 루이지 갈바니(Luigi Galvani)가 정의한 ‘심장의 황홀(enchantement du cœur)’과 매우 유사한 영적 상태입니다.”


‘심장의 황홀’—즉 갈바니의 인칸테시모(Incantesimo)—은 개구리의 척수에 바늘을 찌를 때 나타나는 심장 박동의 일시적 정지를 가리킵니다. 조이스는 『트리에스테 노트』에서 셸리의 말을 인용합니다.


“영감의 순간은 너무나 짧아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과도 같다. [...]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것은, ‘부성적 의미(signification paternelle)’가 불려 오는 자리이자, 그러나 그 의미가 결코 도래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심장 박동과 박동 사이, 그 침묵의 심연 속에서, 초자연적인 광휘와 함께, 상징계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실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심장이 멎는 순간(심장의 정지, 시간의 정지)이라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존재를 갑자기 비추는 이 광휘는, 신비주의자들이 ‘영원한 순간’이라는 역설로 지칭했던 것이며, 이를 단순한 수사적 ‘비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실재의 ‘현재화(presentification)’입니다. 모든 것이 그 안에, 어떤 ‘저편’도 없이, 순수한 현존의 펼쳐짐 속에 있습니다. 결여가 사라질 때, 시간성도 사라집니다—미래도, 다른 세계도 없습니다.


이 광휘는 세계라는 장면 너머에 자리한 ‘큰 사물(la Chose)’의 잠재적 존재를 가리키며, 바로 실재 그 자체가 번쩍이는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기초 개요(Esquisse)』에서 가설적으로 말했듯, 향유의 원초적 양식이 환각적이라면, 에피파니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영원히 잃어버린 ‘큰 사물’과의 불가능한 재회(retrouvaille)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향유—그것이 실재입니다. 클라리타스의 광휘는, 남근적 의미의 공허가 실재 속에 귀환한 것이며, 이 공허는 사물의 자리를 표시합니다. 그것은 향유의 살 수 없는 공간이며, 조이스의 글쓰기는 그 경계를 따라 그것을 둘러싸려는 시도입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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