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덧붙임, 여우 그리고 이단 (4)

by. 아니 타르디츠(Annie Tardits)

by 숨듣다

아들로서의 ‘이미지’에서 아버지로서의 ‘이름’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참조는 이미 『스티븐 영웅』에서부터 예술에 관한 질문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에세이가 금지된 것임을 경고받은 스티븐은 원장 앞에서 자신의 이론을 옹호한다.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름다움’에 대해 내린 정의 ― “[…] 아름다움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완전성, 조화, 광휘(claritas)” ― 를 “논리적 결론까지 밀어붙였다.” 이 아름다움에 관한 언급은 성 토마스가 삼위일체를 논증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미지(species)’라는 말이 제2위격, 곧 말씀이며 아들인 위격에 귀속되는 이유를 그는 탐구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완전한 유사성을 지닌 완전한 이미지이기에, 아들은 ‘이미지’라 불릴 수 있다. 이 완전한 이미지에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합당하다. 창조되지 않은 아름다움, 감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이다. 인간이 예술을 통해 경험하는 아름다움은, 이러한 아들로서의 이미지와 아름다움을 아날로지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아름다움의 경험은 신학자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움 자체의 단순한 아날로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심미적 이미지도 본래적 이미지에 대한 아날로곤에 불과하다. 이 지점은 미끄럽다.


실제로 오리게네스에게 씌워진 오류들과, 니케아 공의회의 주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이를 증명한다. 성경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이미지로서의 아들”이라 한 표현을 문자 그대로 취하고, 이미지와 사물의 구별에 기대어, 오리게네스는 아들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이미지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편, 니케아 주교들은 아리우스의 입장과 너무 가까운 ‘유사본질적(homoiousios)’이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마지못해 ‘동본질적(homoousios)’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인간적 경험에 너무 가까운 ‘유사성’이 아니라, 유사성 자체의 ‘동일성’을 규정하고자 한 것이다. 삼위의 동일성과 구별이라는 전 문제가 여기서도 한 치 차이 ― 단 한 개의 이오타(iota) ― 를 두고 달려 있었다. 이미지가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이미지로서 구별을 유지해야 한다. 단순히 ‘비슷한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조이스가 『스티븐 영웅』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은, 『율리시스』에서의 ‘동본질성’ 사용과 논리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단순히 심미적 경험의 아날로곤일 뿐만 아니라, 스티븐이 “claritas(광휘)가 곧 quidditas(본질)”라고 밀어붙이면서, 그는 이미지와 사물의 마지막 구별마저 없애버린다. 아름다움은, 그 순간부터 사물의 본질이 된다. 정신의 정지(stasis) 속에서, 사물이 자기의 현현(epiphanie)을 성취한다. 그런데 이 사물의 본질의 현존 속에서는, 본질 그 자체가 하나의 ‘대상’으로 현존한다는 것도 읽을 수 있다.


그가 claritas에서 quidditas로 밀고 나간 이 강제적 비약 ― 그가 아마 “성 토마스를 논리적 결론까지 밀어붙였다”고 부른 바로 그것 ― 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본질성에서 출발하여 “아들이 곧 아버지다”라고 말하는 데로 이끌리는 동일한 유형의 비약이다. quidditas, 곧 essentia(본질)는 곧 그리스어 ‘οὐσία(ousia)’다. 이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오우시아 ― 삼위일체의 ‘하나’ ― 가 바로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아름다움, 즉 이미지는 곧 사물이다. 아들은 곧 아버지다.”


조이스의 예술의 예리한 절정인 ‘에피파니’에서, “사물”은 단순한 외양으로부터 벗어나 드러난다.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거리가 무너지고, 은유적 전유가 불가능해진다. C. 밀로가 위에서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조이스가 자신의 글쓰기의 정점으로 여긴 이 순간은, 라캉이 「칸트와 사드」에서 규정한 ‘아름다움의 기능’ ― “근본적 공포에의 접근을 금지하는 최후의 장벽” ― 을 무효화한다. 그러니 스티븐이 이런 단락 회로를 만들어내는 것은 놀랍지 않다.


“바로 하느님이구나 / 만세! 아이! Rrhuii! / 뭐라고? […] / 거리에서의 외침.”


여기서 하느님의 현현 ― 그의 에피파니 ― 는 말씀보다는 목소리 쪽에 속한다. 언어에서 떨어져 나온 목소리라는 대상 쪽에 속한다. 그것은 소문, 고함의 외침이 된다. 말과 분리될 수 있는 목소리의 현존은 『에피파니들』에서도 중심적이다.


은유가 이 근본적 체험을 전달하는 데 실패하는 곳, 즉 환각적 향유에 경계를 둘 수 있는 것은 오직 글쓰기의 과정뿐인 곳에서, 조이스는 이미 『스티븐 영웅』에서 일종의 심미론적 단편을 전개한다.


이를 위해 그는, 그리고 우리를, “삼위일체라는 셋 안의 하나라는 하느님의 견딜 수 없는 정식화” 안에 자리 잡게 한다. 그는 그 자리에 자기만의 방식 ― 이단적인 방식 ― 으로 선다. 『스티븐 영웅』과 『초상화』에서 그는 이미지와 사물의 절대적 동일성으로 접근하며, 그것을 통해 그가 ‘에피파니’라고 부르는 사물의 실재적 현존, 곧 그 자신이 미학적 형식으로 발명했다기보다는 그에게 다가와 강제하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율리시스』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공통적 ― 또는 두 위격을 분리하는 ― 실재로서의 ‘목소리’에 주목하며, 동일본질성(ὁμοούσιος)으로 접근한다. 다시 말해, “점점 더 강제되는 말들”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며, 차용된 사유의 범주 안에서, 끊임없이 침투하고 지배하는 목소리들의 현존을 다룬 것이다.


그 목소리들은 『스티븐 영웅』, 『더블린 사람들』, 『초상화』, 그리고 『자코모 조이스』의 모든 쪽에 나타난다. 그 가운데에는, 그에게 전해지고 그가 아들 조르지오에게 전하게 될 그의 아버지 존 조이스의 목소리도 있다(86). 목소리들은 거기 있었고, 점점 더, 하나의 ‘목소리’가 거기 있었다. 『율리시스』에서는 묘사라기보다 ‘기록’으로 나타나며, 『피네건의 경야』에서는 글쓰기의 재료 그 자체가 되어간다.


그의 글쓰기가 삼위일체, 더 정확히는 οὐσία ― 삼위일체의 “하나” ― 에 의해 틀지워진다는 사실은, 라캉의 가르침에서도 집요하게 제기되었던 이 신비의 난제들과 맞닿는다. 『정신분석의 대상』 세미나 개강 강의에서 라캉은 제자들에게 16세기 플랑드르 태피스트리 앞에 가보라고 조언했다.


“형태가 절대적으로 동일한 세 위격이 창조의 신선한 강가에서 서로 완벽하게 교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장면 ― 그것은 그저 단순히 불안을 자아낼 뿐이다.”


불안은, 주체가 타자의 욕망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결코 속이지 않는 신호이며, 따라서 결코 대상 없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의 재현은, 기하학적 상징들을 버리고 인류 형상적 이미지들이 도입되면서, 예술가들과 신학자들에게 진정한 걸림돌이 되었다. 세 얼굴을 가진 몸, 세 얼굴이 있는 머리, 완전히 똑같은 쌍둥이와 같은 형상들. 이처럼 삼위일체의 “하나”를 시각화하려는 그림들은 괴물적이라 비난받았고, 이단적이라 규탄되었다. 이미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교회는 결국 “은총의 옥좌”라는 도상에 합류했는데, 그것은 삼위일체라기보다는 훨씬 더 부성성(Paternité)의 형식이었다.


조이스가 우리에게 내놓은 이 심미론적 단편들에서, 그는 “교리가 이단에 걸려 비틀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톨릭 텍스트를 사용한다. 그가 이단적 삼위일체에 참조하는 것은, 단순히 텍스트를 장식하기 위한 미끼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와 교회의 몸에서 분리되는 움직임 속에서, 그리고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서, 그는 이러한 추방된 인물들에 매달린다. 아버지의 결여를 선택하는 순간, 그는 또한 가장자리에 선 교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그것은 두 가지 질문을 결합하게 해준다. “아버지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조이스는 아리우스가 아니라 사벨리우스를 붙든다. 아버지와 아들을 실제적으로 묶는 끈을 말하기 위해, 이미지가 아니라 ‘목소리’와 ‘이름’에 자리를 주는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modaliste) 사유는, 그가 “눈짐작으로(à vue de nez)”라도 “증상을 통한 진리”를 붙잡으려 할 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바로 그의 증상이 사벨리우스를 수많은 이단자들 가운데서 고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스티븐은 린치에게 자신의 심미론을 설명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가 예술적 개념, 잉태, 예술적 재생산의 현상에 이르게 되면, 나는 새로운 용어와 새로운 개인적 체험이 필요할 것이다.”


‘건장한 수도승’이 이 문제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초상화』에서 장인의 모델을 참조했던 이 ‘잉태’의 문제는, 『율리시스』에서 ― 특히 도서관 에피소드에서 ― 대대적으로 재전유되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부성성’에 연결한다.


『스티븐 영웅』에서 조이스는 속담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를 대신해 “시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p. 347)라는 명제를 제안한다. 샌디마운트 해변에서 스티븐은 이렇게 곱씹는다.


“죄악된 자궁의 어둠 속에서, 나 역시 만들어졌지만, 낳아진 것은 아니었다.”


이 말로 그는 오랫동안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둘러싸고 문제를 일으켜온 표현을 되살린다. “낳아졌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니케아 공의회가 내린 결론이다. natus et non factus, γἐννητος(낳아진)이지, γἐνητος(만들어진)가 아니다. 이 두 그리스어는 논쟁에서 종종 혼동되었다. 단 한 글자(ν)에 따라, 그것은 신적 낳음의 모델이거나 인간적 제작의 모델이 되었다.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 마치 λόγος를 substantia로 옮기면서 그랬듯이 ― 입장의 강제와, 불충분했지만 어쨌든 용어에 대한 거부감의 해소가 가능해졌다. 영원으로부터의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낳음은, 그 신성을 보장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아리우스의 논리에 의해 끊임없이 문제시되었다.


신학적 논쟁 초기의 혼란은 『율리시스』 초반의 이 대목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 사필귀정이다! 스티븐은 니케아 신경의 명제를 뒤집어 자신을 “만들어진 비(非)낳아진 존재”라 말하면서도,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본질적 동일성(consubstantialité)에 관한 동일한 신경의 선언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었다. 그는 심지어 그들이 공유하는 신적 실체를 지목할 수도 있었다 : 목소리. 목소리는 삼위일체의 핵심으로, 스티븐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 바로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벨리우스적 역설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낳음’(engendrement)과 ‘본질 동일성’에 대한 논의, 그리고 공통된 οὐσία를 목소리라 지목하는 방식은, 265년 안티오키아 공의회에서 사모사타의 바울이 정죄된 사건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바울의 논증은 궤변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는 동시에 예수가 그와 똑같이 “만들어진” 인간이면서도 아버지와 ὁμοούσιος(동일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아들로 “양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교들은 그가 아들이 독자적 실체를 가진다는 점을 부정한다고 비난하며, 그가 사용한 ὁμοούσιος 용어를 배척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ὁμοούσιος를 거부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이 단일한 동일한 인격임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성 힐라리우스) 이 용어는 훗날 라틴 정통의 표지가 되지만, 당시 주교들은 그것이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예컨대 같은 금속으로 된 두 물건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모사타의 바울의 주장은 군주신론자들, 특히 사벨리우스의 주장과 매우 가까웠다. 이 사건은 동방 교부들이 니케아 신경에 다시 등장한 ὁμοούσιος(동질 본질) 안에 사벨리우스적 이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을 두려워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앞선 역사 역시 이 두려움을 확인해준다. “평범한 신도들”이 이 교리에 우호적인 만큼, 로마 교계도 3세기 초반까지 군주신론에 지속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사벨리우스를 파문한(약 215년) 뒤에도 교황 칼리스투스는 직접 사벨리우스적 신앙고백을 했다고 전해진다 : “말씀은 곧 아들 자신이며, 곧 아버지 자신이다… 이름만 다를 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영이 있을 뿐이다… 동정녀에게 육화된 영은 곧 아버지이다.”


니케아의 ὁμοούσιος를 “그 논리적 결론까지” 밀어붙이면, 우리는 사벨리우스주의나 양자론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 운동을 스티븐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모색되는 과정에서, 성 토마스와 교회사가들이 이단의 대표로 지목한 사벨리우스와 아리우스는, 사실 서로 보완적이었다. 하나를 반박하다 보면 다른 하나로 기울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핵심적인 난점은 하느님의 본질적 부성(Paternité)을 사유하는 어려움이었다. 한 인간 아들이, 자신을 그 아버지이자 하느님이라고 칭할 때 나타나는 그 어려움. 이 부성을 생각하기 위한 유비는 인간적 아버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 역시 제대로 사고되기 어려웠다.


출발점은 달랐지만, 이단자들은 공통적으로 “아버지/아들의 영원한 관계가 하느님의 본질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공유했다. 본질은 오히려 “유일자”(l’Unique)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정통은, 본성상 하느님은 아버지이며, 그가 영원히 아들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신학적 담론의 더딘 정립 과정은 성 이레네우스의 진술 ― “비록 우리의 구원의 경륜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고 하지만, 하느님은 단 한 분이다” ― 에서 시작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는 곧 유일한 하느님이다”라는 명제로 나아간다. 이는 하느님을 인간적 관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 “비록”(quoique)에서 “그리고”(et)로의 전환 ― 즉 “삼위일체이자 유일한 하느님” ― 에는, 수세기 동안의 논쟁과 상호 파문, 황제들의 개입, 그리고 철학적 담론에서 빌려온 정교한 개념 장치의 채택이 필요했다.


초기 이단자들은 “하느님은 아버지다”라는 믿음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부성을 ‘낳음’으로 이해하느냐 ‘명명’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갈라졌다. 그 논리적 귀결 ― 의도적이든 아니든 ― 은 결국 그리스도의 신성을 문제 삼는 것이었다. 아리우스는 주로 ‘낳음’을 문제삼았고, 사벨리우스는 ‘명명’을 강조하는 군주신론(modalisme)의 흐름에 속했다. 하느님의 이름들 ― 아버지, 아들, 성령 ― 은 곧 하느님의 양태들(modes)이라 여겨졌다. 앞서 칼리스투스의 신앙고백처럼 : “말씀은 곧 아들 자신이며, 곧 아버지 자신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름은 동일한 하느님에게 적용된다.”


정통은 이 두 문제를 결합하려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 안에서의 중심 개념인 ‘관계’를 통해, 낳음과 명명을 동시에 포괄하는 구조를 세우려 했다 ―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인간적 부성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예컨대 성 빅토르의 리샤르 신학에서는) ‘셋’보다 ‘둘’의 승리가 나타났다. 아버지와 아들의 ‘둘’이 먼저이며, 여기서 ‘셋’(사랑)이 유래한다. 또한 그것은 ‘하나’보다 ‘둘’의 승리이기도 했다. 비록 신학 담론이 인간 언어의 무력함을 선언하면서도, 사벨리우스와 양태론자들이 가정한 그 간극을 메우려는 경향을 보였다. 즉, 하느님은 유일자이며,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들은 그를 지칭하지만 그를 직접적으로 ‘이름 짓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하나’는, 사실 “우리는 한 몸이다”라는 “하나” ― 곧 성적 관계에 (명백히 빠져나가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가장 거친 방식 ― 와 같지 않은가?


이단적 “하나”는 오히려 발화 불가능한 ‘일자적 획’(trait unaire)의 편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고유명사가 매번 발화될 때마다, 그 작용은 드러난다.


사벨리우스의 궤변을 경유함으로써, 조이스는 자신을 원인하는 그 ‘틈새’ ― 그의 표현대로라면 ‘공허’ ― 를 포착한다. 그 공허는 사유가 피하고, “원 안에서 자립하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메워지는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려면, “논리가 당혹해지는 장소,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불일치가 폭발하는 곳”이 필요하다. 바로 거기에 조이스는 가톨릭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을 자리 잡는다. 그 불일치의 지점은 도상학과 예배의 장에서 감지된다. 삼위일체의 상상계는 상징계의 장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며, 바로 그곳에서 조이스적 조롱(dérision)이 작동한다. 그 조롱을 통해 조이스는, 공허와 더불어 솟아오르는 불안을 가리려 한다. 그리고 그 불안은 악마적 형상 속에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공포하면서 동시에 매혹하는 대상을 부정하려 시도한다. 이미지를 통한 이런 회피를 넘어, 사벨리우스의 역설은 그에게, 그 공허에 가장 가까이 설 수 있는 상징적 장치를 제공한다.


사벨리우스처럼,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스티븐과 블룸은 “말”과 “낳음”의 불가능한 결합, 곧 ‘명명’과 ‘공허’의 끈을 두드리며, 부성이란 결국 하나의 말하기임을 드러낸다. 사랑이 하나의 말하기인 것처럼. 사건들. 만남들. 그리고 언제나 구조로서의 ‘실패’와 함께.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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