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덧붙임, 여우 그리고 이단 (2)

by. 아니 타르디츠(Annie Tardits)

by 숨듣다

<우주의 첫 번째 수수께끼>

“수탉이 울고,
하늘은 파랬다.
착한 하느님의 종소리는
열한 시를 알렸다.
이 가엾은 영혼이
하늘로 갈 시간이로다.
무엇일까요?...
— 호랑가시나무 덤불 아래
자기 할머니를 묻는 여우.”


나는 이 수수께끼를 처음에는 마치 ‘엑스퀴지 캐다브르(cadavre exquis, 기괴한 시 짓기)’와 같은 구조로 읽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답변을 고려하면, 이런 의도적인 우연의 조합은 꽤나 기묘한 맛을 띤다. 질문이 거의 너무나도 명백하게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환기시키고 있다면 ― “이 가엾은 영혼이 하늘로 갈 시간” ―, 그 답은 rebus나 꿈처럼 해독될 수 있다. 여우, 할머니, 호랑가시나무, 덤불, 장례.


호랑가시나무(holly)는 가시 면류관, 예수의 피와 연상된다… holly bush에서 holy bush, 그리고 burning bush(불타는 떨기나무)로 이어지며, 변호사 부슈(Bushe, 아일랜드 법무관)까지 덧붙는다. 게다가 이미 1904년의 『초상화』에서도 이런 이중어법은 나타난다. “과도한 불타는 덤불 깊은 곳에서 그는 야간 근무 중인 한 경찰관에게 매춘부들의 진정한 지위에 관한 연설을 내뱉었다.” 불타는 덤불… 성적 털숲… 또한 덤불은 성모를 나타내는 도상학적 상징이기도 하다.


어머니 대신 할머니? 아마 그렇겠지만, 할머니는 또한 첫 번째 이브, “우리 모두를 사과씨 한 알 값에 팔아넘긴”, 곧 최초의 매춘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우는 왜 등장하는가? 무엇보다도 파넬(Parnell) 때문이다. 그가 가명으로 사용했던 이름이자, 결국 그의 몰락을 불러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스티븐이 『초상화』 마지막에서 주장한 “나는 여우짓(foxing)하지 않는다”라는 자기 변명 뒤에 곧바로 “나는 여우짓한다”라는 역설적 선언을 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로부터 스무 페이지쯤 뒤, 한 마리 개가 해변에 나타난다. 그 길 위에서 개는 다른 개의 사체와 맞닥뜨려 코를 박는다. 이를 목격하던 스티븐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 가엾은 개의 몸이여! 여기 누워 있노라, 가엾은 개의 몸이여.” (그런데 바로 이 “아! 가엾은 개의 몸이여”라는 말로 멀리건은 스티븐에게 새 셔츠와 면도기(lather) 공급을 약속했었다. 이제 스티븐은 자기 자신과 닮은 이 개가 시체를 들이마시는 모습을 보며, 마치 빨려들듯 직전에 바다에 빠져 죽은 자, ‘성모 바위’ 근처의 익사자를 떠올린다.


“한 남자가 빠져 죽는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나를 향해 울부짖는 그의 눈. 나… 함께 가라앉는다… 그녀를, 나는 구하지 못했다. 물, 쓰라린 죽음, 잃어버림.”


개는 사체를 버려두고 모래를 파기 시작한다. “거기 뭔가를 묻은 것 같군, 그의 할머니를.” ― 개로 변장한 여우의 모습 속의 스티븐…


기만적이고 교활하며, 시체를 뒤지고, 광견병과 전염병을 나르는 존재. 바로 이런 평판 덕분에 여우는 1561년 푸아시 종교회의(Colloque de Poissy)에서 예수회 신부 라이네즈(Laínez)가 이단자들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동물의욕적 모욕어 사전에 당당히 들어갔을 것이다. 늑대, 뱀, 암살자, 맹수들과 함께.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적” 이단들(발렌티누스, 마르크 마술사, 마르키온…)을 서술하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그들을 폭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과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힘껏 이 잘못 빚어진 여우의 몸뚱이를 빛 속에 끌어내고 드러내려 애써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단지 보여준 데 그치지 않고, 그 짐승을 사방에서 상처 입혔다.”


『피네건의 경야』 제7장에서, 셈(Shem)의 재판은 다소 불완전하게 지어진 몸을 불러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이지 않게 되는 재능을 지닌 소년”을 드러내고, 빛 속으로 끌어내려는 시도일까? 셈의 과거는 샨(Shaun)에 의해 샅샅이 조사되며,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다시 하나의 초상, 또 하나의 초상이 ― 이번에는 문장의 인간, 글의 인간(문필가) ― 그려진다. 이 잡종은 어떤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가? 반쯤 지어진(setnus sumus), 불완전하거나 미완성, 귀만 있고 눈은 여덟분의 일뿐이며 엉덩이는 오분의 이만 가진 자, 바로 이 “씨 뿌리는 자의 아들.” “아버지가 내게 뿌릴 씨앗을 주셨네…”.


이 천박한 허세꾼은 차 시간에 통조림 연어를 더 좋아한다. 그리스적 마음을 가진 이 유대인에게는 신앙의 장작불 위의 발라클라바 튀김은 없다 (fried-at-belief-stakes는 소리 내어 읽으면 beefsteak와 겹친다). 이 무급의 민족적 배교자, 우스꽝스런 장난의 제조자, 신성모독자는 자기 자신 안으로 망명하여, 가식과 차용으로 살아가며, 희망도 자원도 없이 술에 취해 떠돌았다. 그의 쌍둥이이자 천상의 평신도 형제 데이비 브라운-놀란과 함께. 이 무능한 자의 인위적인 언어는 언어의 가장 작은 부스러기들을 보물로 만들었고, 이 드럼콘드라 출신 파문자의 펠라기우스적 펜은 수많은 팔림프세스트를 경건하게 모방했다. 그는 혀 짧은 소리 ― patatiparnella ― 로 끝없이 이어지는 횡설수설 속에 그의 황폐한 사유를 흩뿌렸다. 셈, 해체된 이성의 소유자. 네로조차도, 이 체루빈조차도, 그의 놀라운 괴물성에 대해 이 도덕적·정신적 결함자가 품었던 것보다 더 부패한 견해를 품지는 못했다.


온 장이 곧 문필가-말장난꾼에 대한 기소의 누적이다. 조이스는 이를 마음껏 전개하며, 모욕과 비난의 어휘를 퍼붓는다. 이건 축제다. 18세기 초 예수회 수사학 교본 Dictionarium poeticum이 이단을 타격하기 위해 권했던 바로 그 방식에 충실한, 비난의 축제. 무려 열아홉 개의 형용사 ― 기만적이고, 야만적이고, 불길함이 지배하는 ― : effraenis, superba, impia, detestanda, feralis, infanda, dira, horrida, audax, fallax, mendax, atrox, saeva, scelesta, infesta, perfida, amica furori, scelerata, exitiosa. 그것은 필연적으로 파멸로 이끈다. 그리고 셈은 결코 잘 끝날 수 없었다.


스티븐-셈-제임스의 재판은 이단자의 재판이다. 마침내 그는 폭로된다. 시체 냄새 맡는 자, 무덤을 파헤치는 자, 말장난의 품속에 악의 둥지를 찾는 자…


이는 『율리시스』 서두에서의 스티븐 자신의 자기고발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히 반복한다. 특히 조사 초입의 논거는 셈을 수수께끼 제조자로 지목한다. 그는 자신의 어린 형제자매들에게 “우주의 첫 번째 수수께끼”(F.W., 170)를 불러주지 않았던가? 이 최초의 수수께끼 ― Riddle me, riddle me… ― 는 이렇게 다시 표현된다. “언제 한 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뒤이어 돌아올 지연된 답은 지오르다노 브루노의 별명 가운데 하나, Nayman of Noland 속에 깃들어 있지만, 당장 셈-박사(Shem-the-Doctor)가 내놓은 답은 이렇다. 한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때는, 셈(Shem)이 샴(Sham)일 때. 곧 이름, 최고의 이름,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을 대신해 오는 이름, Shem-le-Nom이 Sham일 때. 이름은 허상이고, 셈은 샴이다. 불과 한 글자의 차이. 바로 그 한 글자의 차이로 그는 가장, 혹은 수치가 된다. Shem la feinte(셈은 가장), Sham la honte(샴은 수치), 스티븐은 여우.


그렇다고 해서 『피네건의 경야』가 『율리시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준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일일 것이다. 비록 그 할머니 ― grannyma Anna Livia ― 역시 등장하니 말이다. 뱀과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여인. 그녀는 마지막에 그것을 “quoiquoiquoiquoiquoi(무엇무엇무엇무엇무엇)”로 열어젖힌다.


그렇다면 여우의 수수께끼란 단지 하나의 가장에 불과한 것, 조이스가 팔꿈치 밑에 감춘 채 전통적 수수께끼의 시작만을 내놓고(“Riddle me, riddle me… 아버지가 내게 씨앗을 주셨네…”) 끝내 밝히지 않은 그 수수께끼의 시늉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나의 수수께끼는 또 다른 수수께끼를 감춘다! 그리고 조이스는 고전적 놀이들의 목록 한가운데(F.W., 176) 독자 몰래 『율리시스』에서는 삭제해둔 이 수수께끼의 답을 슬쩍 흘려보내지만, 독자-심문관은 헛수고를 할 따름이다. 그 답은?


편지를 쓰는 것(Writing a letter)!


우주의 첫 번째 수수께끼에 대한 이 답은, 곧 궁극적 수수께끼이다. “쓰기라는 힘으로 고양된 수수께끼” : 기표 하나의 차이로 의미의 극점이 전개되는 조이스의 텍스트. Shem, Sham, Shame. 단 한 글자의 차이.

이 답변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이단자적 여우는 과연 피할 수 없는 관문일까?


영혼은 “결코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 […] 나는 말하고자 했다. 결코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 벨베데레 대학에서의 이 사건에서, 스티븐은 이단으로 고발당했으나 단 한 동사의 수정으로 그의 교리적 오류는 곧 필기의 말실수(lapsus calami)가 되었고, 피조물이 하느님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간신히 보존되었다.


『피네건의 경야』에서 셈의 재판을 앞두고, 이단자-여우는 우화 속 여우의 모습으로 교묘한 복수를 한다. 맛있어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빨간 포도를 본 여우가 그것들을 푸르다고 선언하는 장면처럼. “불평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이번에는 대상 자체가 바뀐다. 갈망하고, 희망했지만 닿을 수 없었던 빨간 포도에서, 초록 포도로… 바로 아이들의 이를 시리게 만들었던 그 포도로. 그리고 아이는 여우의 가면을 빌려 쓴다. The Mookse and the Gripes: 와키언(Wakean) 어법의 배음을 잃지 않고서는 번역할 수 없는 이 제목은 이미 조이스의 글쓰기 선택을 드러낸다. 이 우화는 또한 잘못의 선택, 매 순간 승리하는 필기의 말실수, 그리고 결핍의 선택과도 동질적인 결정을 보여준다.


Gripes는 포도(grapes)이면서 동시에 발톱(grips)과 움켜쥠(grip)을 뜻한다. Mookse는 mocks — 여우(fox)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조롱, 모조, 풍자를 뜻하기도 한다. 『초상화』를 여는 moocow에 대한 조롱까지 포함해서.


조이스 버전의 이 우화에서, 간계와 조롱은 극한에 이른다. Mookse라는 여우는 다름 아닌 교황권을 대표하는 호전적 인물, 즉 아벨라르의 제자이자 공화주의적 이단자인 브레시아의 아르노를 탄압했던 교황 아드리안 4세다. 바로 그 영국인 교황은 아일랜드 정복 이전부터 헨리 2세의 아일랜드에 대한 주권을 승인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교황-여우는 이단자-여우라는 가설을 무너뜨리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조이스의 텍스트에서는 교묘한 예수회 신부들조차 “여우 대가”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Mookse and Gripes라는 우화는 십자군 교황권을 환기시키는 배경 위에서 쓰였다. 바로 그 교황권은 동방 교회와의 대립의 핵심에 있었고, 결국 정교회의 분열을 낳았다. 아드리안-여우는 세 차례 십자군을 소집했던 우르바누스, 에우제니우스, 클레멘스, 그리고 성 패트릭을 아일랜드로 보낸, 펠라기우스주의와 싸우고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했던 첼레스티누스의 당당한 후계자다. 『피네건의 경야』는 그들을 명시적으로 참조한다.


그가 만나는 Gripes는 아마도 성 말라키와 성 로렌스 오툴, 곧 교회를 로마에 복속시키는 문서에 서명한 아일랜드 대주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료들만큼 교황을 이단으로 규탄할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이스는 주저하지 않는다. 이 푸른 포도 때문에 많은 아일랜드 아이들의 이가 시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우화는 『율리시스』 초반 스티븐의 곱씹음을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한다.


“우리 영국인들은 우리가 여러분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았음을 느낀다 […] et unam sanctam catholicam…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진 그들의 신앙 독창 […] 달아나는 이단들의 무리…”.


신학적 질문의 한복판에는 교회의 정치가 있다. 이단의 문제 한가운데에는 진리의 권위와 보증의 문제가 있다. 바로 이단의 자리에서, 교회의 신학과 정치가 서로 얽혀 있다. 그것은 곧 교회가 진리의 권위를 어떻게 확보하고 보증하느냐의 문제, 곧 아버지와 저자, 그리고 하나(一)의 상호 덮침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삼위일체 논쟁을 통해 이단 교리의 핵심이 반복적으로 문제 삼는 곳이다.


이단자의 세 가지 순간

스티븐은 스스로를 이단자로 드러낸다. 그는 그 동일시를 조롱하기도 하지만, 조이스는 여러 차례 그것이 그의 글쓰기 선택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비춰 보인다. 『피네건의 경야』에서의 셈 재판과, 그 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이단 논문은 조이스의 텍스트 안에서 이 선택의 구조를 밝혀줄 수 있는 것을 찾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것의 좌표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전환적 텍스트 안에서 발견된다.


『초상화』 속에서 이단에 대한 언급이 나타날 때, 우리는 아직 『율리시스』의 삼위일체적 조롱으로부터는 멀다. 그러나 분노, 오만, 불안이 뒤섞인 그곳에서 이미 몇몇 인상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단이라는 규정은 세 가지 순간에 스티븐을 특징짓는다. 즉, 벨베데레에서의 논문 사건, 『유혹자의 빌라넬』이라는 시의 집필, 크랜리와의 최종 대화가 그것이다.


“고백하라!” 헤론의 이 명령 앞에서, 스티븐은 동료들의 농담에 몸을 맡기듯 복종하며 『고백송(Confiteor)』을 읊조린다. 이 “불경스러운 행위”로 그들을 웃게 만든다. 그러자 앞서 언급한 헤론과 얽힌, 또 다른 복종 행위와 이단의 일화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몰락과 더블린으로의 이주 직후, 벨베데레에서 보낸 초기 시절, “이해받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던 스티븐은 한 논문에서 창조주와의 관계를 논하다가 영혼은 “결코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라고 진술했다 ― “이건 이단이다.” 자신이 “들통났다”는 느낌에 그는 필기의 말실수(lapsus calami)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사실 “결코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쓰려 했다고.


“그건 복종의 행위였다.” 얼마 뒤, 헤론과 다른 학생들이 바이런은 이단자이자 부도덕한 자이며, 그가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말하는 스티븐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스티븐은 완강히 거부한다. 그는 매질을 당한다. 매질은 그를 이단자로 지목하며 가해진 것이었고, 라캉이 그의 세미나에서 주목했던, 몸의 흔들림과 이완의 계기가 되었다.


이단, 잘못(스티븐의 말실수와 바이런의 근친상간), 그리고 글쓰기는 이 순간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 회고적 배열은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보이게 한다. 여기에는 또한 가면과 계략, 복종과 고백, 흔들림과 최종적 불굴이 함께 있다. 그것은 이미 잘못의 선택이다. 되돌아갈 수 없는 최초의 잘못, 사건의 지평 위에 드리운 아버지의 잘못, 상징계의 잘못, 잘못을 말하기 위한 잘못된 글쓰기의 선택이다.


『초상화』에서 두 번째 이단의 순간은, 그것이 다시 글쓰기와 잘못에, 그리고 이번에는 명확히 ‘여성’에 연결된 사건으로 나타난다. 새벽 전, 스티븐은 “마음의 황홀”을, “세라핌적 삶의 황홀경”을 경험한다. 비유적일 뿐 아니라 실질적일 수도 있는 성모에의 동일시 속에서, 그는 성령에 사로잡혀 한 편의 시를 낳는다. “상상력의 동정녀의 자궁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놀라운 이 장면에서, 조이스는 시의 생성과정, 스티븐의 사유의 움직임, 그리고 그의 비전을 완전히 포개어 보여준다. 조이스는 이 시, 『유혹자의 빌라넬』을 계시(epiphanie)의 발견과 연결시키며, 실제로 이 순간의 서술은 조이스적 계시가 보여주는 ‘실재와의 참된 만남’의 성격을 드러낸다. 스티븐은 그 누구도, 또 누구도 알 수 없는 “낯선 마음”을 지닌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성모는 또한 “타락한 세라핌들의 미끼”로 주어진다. 곧 동정녀이자 유혹자! 황홀은 깨어지고, 그의 심장의 외침은 부서지며, 스티븐은 『빌라넬』의 연들을 써내려간다. 그는 그제야 또 다른 ‘그녀’를 떠올린다 ― 자신이 그녀를 위해 거실에서 노래했던 그때 ― 그리고 대화를 기억한다.


“요즘은 잘 안 보이시네요.”
“맞습니다, 저는 수도사가 될 운명이었지요.”
“당신은 이단자가 될까 두렵군요.”
“그렇게 두렵습니까?”


그리하여 스티븐은, 흠 없는 동정녀의 한가운데 유혹자를 끼워 넣은 뒤, 다시금 이단자로 불린다. 그는 그때 솟아오른 자기 이미지 ― 수도원을 더럽히는 자, 원하면서도 원치 않으며 봉사하려는 프란체스코회 이단자, 궤변을 엮으며 소녀의 귀에 속삭이는 자 ― 를 거부한다. 이 이미지는 차라리 애매한 사제들에게 더 알맞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녀는 비둘기 같은 눈길을 보내던. 소녀의 이미지는 깨지고, 황홀은 사라지며, 스티븐의 분노는 자기 나라 여인들에게 향한다. 그녀들은 농부 차림의 사제 귀에 자기들의 무구한 과오들을 속삭이며, 영원의 상상력의 사제보다 그런 이들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이 애매한 사제가 되는 것을 스티븐은 꿈꾸기도 했다. 그는 엠마에게 그녀가 자기에게 고해하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그녀를 사제의 품으로 밀어 넣고 싶다는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결국 그가 예수회에 들어가라는 원장의 초청을 거절하며 던진 것도, 사제들이 가진 비밀스러운 앎과 비밀스러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쾌락에 대한 공포의 표출이 아니었던가? 그는 “떨어질 것”이었다. 낯설고 고집스러운 마음, 여기서 루치퍼의 Non serviam과 겹쳐지는 그 마음에 현혹되어 빠져든 세라핌처럼.


스티븐은 이미 1904년 『초상화』에서 “성모의 외설적 지옥”을 향해 던진 부정 ― “그의 Nego는 우리의 성모의 외설적 지옥을 향해 날아갔다” ― 을 통해 성모를 부정할 수 있었다. 이 부정은 그가 막 사제가 되려 했던 여성의 형상 위에 그어진 가로줄로도 읽힐 수 있다. 성모의 외설적 지옥은 곧 “성욕에 탐닉하는 하느님”의 다른 얼굴이다. 그러나 이 부정 안에서 그는 자신이 모욕하고 조롱하는 그 존재에 대한 새로운 형식의 경의를 예감한다. “그 어두운 눈동자의 비밀 뒤에… 그의 종족의 비밀”을.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 ― 곧 자기 종족의 창조되지 않은 의식을 형성한다는 사명 ― 안에 이 이상에서 추락한 여성은 필연적으로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있는 곳에서 그녀가 자기 몸을 성취하게 하는 열망에 참여한다는 확신 속에서, 그는 여성적 요소에 자신을 맡긴다. 그러자 “온 공간을 사방에서 적시는 물처럼, 말의 액체적 글자들이, 신비한 요소의 상징인 그 글자들이, 스티븐의 뇌수에서 흘러넘쳤다.”


그가 방금 확립한 것은 이것이다. 여성 쪽에서는, 잘못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는 하나도 없다. 그것은 필연적인 잘못이지, 행복한 잘못(felix culpa)이 아니다. 필연적이란, 결코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쓰기’ ― 그것이 스티븐이 이 낯선 순간에 하는 일이다. 그는 잘못, 여성, 글자를 얽어, 훗날 그의 작품 속으로, 그리고 노라와의 관계 속으로 돌아올 운명의 매듭을 짓는다.


『초상화』는, 크랜리에게 간략히 전하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스티븐이 어머니와 성사와 신앙을 두고 나눈 그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대화를 다시 담지 않는다. 『스티븐 영웅』에 기록된 이 대화는 ‘빌라넬’ 사건과 짝을 이룬다. 스티븐의 조롱에 무너진 그의 어머니는 마침내 아들의 병은 지적 오만이라고 선언한다. “너는 하느님께 도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들이 굴하지 않자, 어머니는 책들을 탓하며 말한다. “이 책들을 다 태워버리겠다.” 그녀의 흐느낌은 아들의 말에 덮인다. “당신이 진정한 로마 가톨릭 신자라면, 어머니, 책뿐만 아니라 나까지 태워야 할 것입니다”. 한 여성, 곧 그의 어머니. 그녀는 자신과 아들 ― 더 나아가 자신과 모든 남성 ― 사이에 사제의 그림자를 세움으로써, 아들에게 이단자적이며 악마적인 자기 모습을 되돌려주었다. 이 고통스러운 대립은 어머니의 죽음 때 다시 반복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율리시스』가 시작된다.


이 대화 직후, 스티븐은 크랜리를 찾고 ― 드문 일이지만 ― 그에게 말하고 싶다고 청한다. 이것이 『초상화』 속 이단의 세 번째 순간이다. 스티븐은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태도의 이유를 “나는 섬기지 않겠다”라는 말로 밝힌다. 이는 유명한 Non serviam의 반향이며, 크랜리와의 대화 끝에서도 반복된다. 『스티븐 영웅』은 이 거부를 더 명확히 밝힌다. 그는 예술가로서 그 교회를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와 내 또래가 만들어낸 이 교회, 그 전례, 전설, 의식, 그림, 음악…”. 또한 그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벗어나게” 하고, 자기 고백이 성립시켰던 큰 타자를 불완전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는 그렇게 해서 건물의 겉보기 견고함을 해치려 한다. “교회는 지브롤터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에 비해 몰리는 『율리시스』의 진정한 바위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스티븐 영웅』의 재작성으로서 이 대화를 진정한 “결론의 순간(moment de conclure)”으로 제시한다. 이는 곧 주체가 성립되는 행위를 구조화하는 세 순간 중 마지막 순간이다. 라캉이 “논리적 시간” 개념을 통해 밝힌 바로 그 세 순간 말이다. “결론의 순간”은 뒤늦게 다른 두 순간을 드러내 보이며, 이제 그것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한다. 논문 사건은, 이단에 관한 지식에 기대어, “시선의 순간” 속에서 스스로 이단자라는 확신을 선취하게 했다. 그는 의심의 시간, 자신과의 논쟁, 어머니와 교회의 지지자들과의 논쟁, 이 만남들의 정점에서 거울처럼 떠오르는 이단 교주들의 형상 앞에서의 매혹과 후퇴를 거쳐야만, 자신을 원인 짓는 것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제야 그는 떠날 수 있었다.


떠남의 순간에, 크랜리는 유혹자처럼 스티븐에게 여러 이유를 내세워 그의 선택의 결과 앞에서 물러서게 하려 한다. 의심은 신앙의 일부라느니, 신앙은 행복에 더 잘 어울린다느니, 고통받는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몇 가지 생각쯤은 희생할 만하다느니, “어떤 나귀 멍에꾼도 자기에게 생각이 있다고 믿는다”느니. 스티븐을 흔들려는 그는 심지어 신성모독적인 발언까지 한다. 그러자 스티븐은 묻는다. “당신은 나를 개종자(convert)로 만들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당신 자신을 타락자(pervert)로 만들고 싶은 겁니까?” 영어는 여기서 pervert라는 단어의 이중 의미 ― 타락자이자 배교자 ― 를 드러낸다. 이는 곧 이단적 선택 속에 자리한 père-version(아버지-전환/아버지-도착)의 차원을 드러낸다.


스티븐이 떠나는 이 출구에 작용하는 것은 “성급함의 기능”이며, 그것은 그의 말 속에서도 감지된다. 이제 떠날 때다, 나는 떠나야 한다. 바다로! Away, Away (『피네건의 경야』 마지막의 *Array! Array!!*를 참조).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성급함이 결코 “어떤 멍청한 자라도 가질 수 있는 생각”이나, 스티븐이 자기 미래를 상상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외로운 마음”에 다가와 떠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그가 다른 목소리 ― 부엌에서 노래하는 여인의 목소리 ― 를 들은 직후에 도착한다. mulier cantat라는 라틴어의 다정한 아름다움, 그리고 십대 소년처럼 모호하게 나타나는 여성의 형상, 전례 속에 나타나는 그 모습… 마침내 결정적인 것은 크랜리의 이미지를 바라본 순간이다. 잘생긴 얼굴, 단단하고 강건한 몸, 어머니의 사랑에 관한 그의 말은 스티븐에게 이런 생각을 준다. “그는 여성들의 고통, 그들의 육체와 영혼의 나약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강하고 결연한 팔로 그녀들을 보호할 수 있으며, 또한 그녀들 앞에서 자신의 정신을 굽힐 줄 알 것이다.”


“그래, 그는 떠날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와도 경쟁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역할을 알고 있었다.” 스티븐은 크랜리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도 상상적 경쟁을 버텨낼 수 없다. 떠나면서 그는 원장 면담 이후 이미 했던 선택 ― 자신의 결핍, 그리고 아버지의 결핍 ― 을 다시금 확인한다. “그는 자기 역할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 속에는, 라캉이 죄수들의 탈출에 부여한 것과 같은 확실성의 지점이 읽히지만, 동시에 후퇴하지 않으려는 결단과 모험의 성격도 담겨 있다. “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평생 동안, 어쩌면 영원에도 이르는 실수를.”


이 세 가지 『초상화』의 순간들 ― 라캉이 조이스의 텍스트 속 “성급함의 기능”과 “논리적 시간”의 집요함을 지적한 대목이 정당화되는 순간들 ― 속에서, 이단은 망명이라는 예견 속에서 상상적 전환을 보장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전환은 행위, 사건으로 인정될 수 있다. 주체를 절단하는 사건. 그러나 주체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읽기라는 사후적 작업이 그 좌표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주체 자신에게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여러 모로, 『초상화』 자체가 그러한 읽기다. 곧 조이스가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생산할 해석의 첫 번째 양식이다.


어머니와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버지의 결핍을 선택하는 그 움직임 속에서, 스티븐은 스스로를 이단자로 드러낸다. 배제된 자들의 이미지가 그의 입장을 떠받친다. “나는 참회할 수 없다”는 그의 최종적 불굴은 『초상화』를 닫는다. 그것은 어머니의 명령 ― “용서를 청하라… 그렇지 않으면 독수리들이 네 눈을 쪼아 버릴 것이다” ― 로 시작된 책을 마무리하는 말이다. 결론의 순간에서 스티븐은 자신이 허용하는 단 하나의 무기를 주장한다. 침묵, 망명, 교활함.


이 선택의 의미를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망명이 이단자들에 대한 형벌이었고, 파문(excommunication)이란 결국 ‘공동체와의 교통(communion, communication)’ 밖으로의 추방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침묵은 그 효과 가운데 하나다. 대파문에 걸린 이는 “세속적 행위” ― 입맞춤, 인사, 식사, 대화 ― 에서도 배제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교활함은 전통적으로 이단자들에게 씌워진 비난이었고, 끊임없이 폭로되고 추적되었다. 따라서 스티븐은 이단의 낙인을 스스로의 무기로 삼으며 결론짓는다. 그의 고집은 조르다노 브루노의 그것과 겨루려는 듯하다. 이단자의 불명예의 표식을 무기화하는 그의 선택은 『율리시스』와 『피네건의 경야』에서 그가 등장시킬 “이단 교주들의 동물원” 속에서, 이단적 사유의 상상적 조직을 통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이단적 선택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이단을 만드는 것은 그의 사상이라기보다, 결국은 최종적인 불복종과 완고함(pertinacia)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파문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경우 그것이 진정한 ‘자가 파문(auto-excommunication)’이라는 것이다. 크랜리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말이다. 이 자가 파문은, 성 토마스가 한때 고려하다가 결국 배제했던 개념이기도 하다 ―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해 사법권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자가 파문은 또한 셈의 재판 속에서도 작동한다. 조이스는 거기에 이단의 기표들을 달아놓는다. 그것은 『스티븐 영웅』에서 이미 등장한 환상, 곧 글쓰기 속에서 동시에 참회자이자 고해사제가 되는 환상의 변주로 읽힌다] 바로 그 형식 안에서, 이 환상은 주체가 드러내는 분열을 접합하려 애쓴다. 『초상화』의 최종적 자가 파문은, 환상의 진정한 무대화이며, 그 분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자가 파문을 통해, 조이스는 ‘보증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응답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다. 만약 진리를 권위 있게 세우려면 타자의 자리에서 아버지, 저자, 하나가 겹쳐져야 한다면, 조이스가 만난 것은 오히려 아버지의 결핍, 상징계의 틈이었다. 그의 자가 파문은 또한, 스티븐이 타자의 불완전성을 마주쳤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고해성사를 고백자 측과 사제 측 양쪽에서 접근하면서, 그는 잘못의 고백 속에서 타자를 보충하려는 시도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곧 쾌락에 의해 탈보충된 타자의 불일관성을 폭로했다. 타자도, 아버지도, 결코 하나로 붙잡힐 수 없다.


자가 파문이란 곧 이렇게 논리적 귀결을 끌어내는 것이다. “타자는 존재하지 않기에, 나에게 남은 것은 죄를 나 자신에게 떠맡는 것뿐이다.” 그것은 원죄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밀어붙이며, 구속 없는 최초의 잘못 ― *증환(Sinthome)*의 최초의 균열 ― 을 긍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망명.

따라서 조이스는 최초의 아버지-저자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를 짊어진 자가 된다. 아버지를 만들어내고, 지탱해야 하는 자. “리처드 망명자(Richard A’Exiles)”처럼 그는 “자기-신비적(automystique)”이다. 그의 단 하나의 권한은 오직 자기 발화일 뿐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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