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 2026
녹사평역을 속속들이 파헤쳐 봤습니다. 하지만 녹사평역은 이 여정의 메인이 아니죠. 그저 지나가는 길이 아름다워서 한번 멈춰 감상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표했던 해방촌 쪽으로 나가 볼까요?
해방촌이나 경리단길은 모두 녹사평역 2번 출구 쪽으로 나가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2번 출구를 이용하면 되겠죠. 그리고 혹시라도 이 사진을 보고 전쟁기념관을 가겠다고 녹사평역에서 내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1번 출구의 '전쟁기념관 방면'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진짜로 그쪽으로 걸으면 전쟁기념관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전쟁기념관이 목적이라면 그냥 한 역 더 가서 삼각지역에서 내리세요. 녹사평역에서 내려서 걸을 이유는 없습니다.
역을 나오자마자 반겨주는 것은 왼편에 미군부대 담장, 오른편에는 대로가 있는 꽤 삭막한 풍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글에는 사진이 많이 없을 예정이에요(사실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냥 날이 너무 추워서 손을 꺼내 셔터를 누를 엄두가 안 났던 것입니다).
다시 이 여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지도로 떠올려 봅시다.
우리가 방금 녹사평역을 막 빠져나왔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이 사진 기행에서 5%도 채 오지 못한 겁니다. 지도로 보면 완전히 미군부대 옆이지 않나요? 그래서 카메라 들고 지나다니다가 혹시 오해받을까 걱정이 약간 되긴 하더라고요.
해방촌이 주목적이라면 그냥 쭉 직진하면 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해방촌 골목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친구랑 점심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해방촌 입구 직전에 있는 지하보도로 길을 건넜습니다.
원래 기행문이라고 하면 다녀온 동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한번 경리단길과 해방촌이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도 풀어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길을 건너면 경리단길이 시작됩니다. 경리단길이 왜 경리단길인지 아시나요? 이 길이 시작하는 곳에 국군재정관리단, 옛 이름으로는 경리단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도로명주소를 정하는 과정에서는 경리단길이라고 하면 보안상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여 회나무로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관할 구청인 용산구청에서 해당 지역 도로 공사를 할 때 현수막에 경리단길이라고 표현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해방촌은 1945년 광복 이후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과 월남민, 6.25 전쟁 피난민들이 남산 자락에 모여 살면서 '해방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해서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일제 시절에는 일본군 사격장이 있다가 미군정 시기 군정 관할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국유지 산자락에 판잣집을 지어 살면서 근처의 미군 부대와 가까워 일자리나 먹을거리를 구하기 쉬웠기에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한 겁니다. 해방촌의 한가운데에 신흥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이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모여 다시 잘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지어진 이름이 아니었을까요.
나무들은 벌써 겨울을 맞아 따뜻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어릴 때 배운 기억으로는 저렇게 해 두면 벌레들이 따뜻한 쪽으로 자리를 옮겨 잡아서 봄이 되어 옷을 벗기면 같이 딸려 나온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진짜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하여튼 간 그렇다니까는 믿을 수밖에요.
평일 점심때쯤이었는데도 녹사평대로에는 차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저 차들은 다들 어디를 가고 있는 걸까요? 보통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에 차를 타고 멀리 나가서 점심을 먹지는 않을 텐데, 세상은 넓고 사람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걸어가면서 괜히 여기로 가자고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같은 미디어에서 보던 그런 풍경은 하나도 안 보이고 그냥 평범한 상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였던 것도 한몫했고요.
그러다가 식당 쪽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꺾으면서 살짝 안심이 됐습니다. 상상 속의 이쪽 동네의 이미지대로 꾸며진 골목이었습니다. 귀여운 벽화와 큰 벽 하나를 가득 채운 다양한 그래피티, 하늘을 가로지르는 꼬마전구들. 각양각색의 외장을 한 특색 있는 가게들이 하나둘씩 반겨주는 모습이라니!
아직 서울 한복판에 이런 아기자기한 골목들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는 보지 못할 풍경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보자는 생각으로 셔터를 눌러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