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이 있으신가요,

해방촌 2026

by 자운

고민(2025)

서울, 용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어디로 가야 더 빨리 가는지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인지 되묻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잠깐 멈춰 지도를 보자. 지금 어디에 있고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확인해 보자. 가끔은 지도가 없는 때도 있다. 그렇대도 주위를 둘러보며 그 자리를 느껴보자.


가고 있는 길이 정답은 아닐지도 모른다. 더 나은 길이 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완전히 헛수고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민하고 후회하는 동안 시간은 간다. 잠깐 멈춰 나의 위치를 살펴본다는 것이 끝없는 후회와 자책이 되어 버리면 안 된다.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었던 선택과 가능성에 미련을 갖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삶이기에.


지금 당신은 무엇을 고민하고 있나요?


나가기 전에 역을 조금만 더 둘러보기로 하죠. 이렇게나 멋있는 공간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우니까요. 일단 개찰구를 나와 볼까요?

[지하 4층]

깊은 곳에 있는 역이다 보니 밖으로 나가는 데에만 한세월이 걸립니다.


개찰구를 나오면 바로 자리한 계단입니다. 양옆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서 다행히도 덜 걸어도 되겠네요. 천정의 채광창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깊은 바닥까지 닿고 있습니다. 햇빛이 주는 따뜻함은 다른 인공적인 광원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지하 2층]

올라오면 바로 유리공예 작품 하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범진, 안혜경 작가님의 '교렴'이라는 작품입니다. 조각보의 느낌을 유리로 표현하셨다고 하는데, 빛을 이용한 유리 조각이 현대적인 감각을 더해 주는 느낌입니다. 머리 위의 큰 돔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지배하는 녹사평역의 공간에 잘 맞는 조형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녹사평역은 원통형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계단이 그 원통의 양 끝에 자리하고 있어서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이용하려면 반 바퀴를 쭈욱 돌아야 합니다.

역을 이용하는 데에는 동선이 번거로워지지만, 그동안 주변에 배치된 다양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느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반 바퀴를 돌고 나면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도 특이한데, 양 방향의 에스컬레이터가 서로 비스듬하게 설치된 것도 새롭습니다. 여러모로 독특한 부분이 넘쳐나는군요.


하지만 에스컬레이터가 너무 기계적이라 생각하신다면 자신만의 속도로 역을 느끼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마련된 유리 계단을 이용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유리 돔 주위로 커튼처럼 내려온 하얀 망은 유리 나루세, 준 이노쿠마 작가님의 '댄스 오브 라이트'라는 설치미술입니다. 시시각각 바뀌는 빛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마침 이 계단이 이 작품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는군요. 이곳을 매일 이용하시는 분들은 철마다 날마다 바뀌는 빛을 별다른 노력 없이도 느낄 수 있다니, 정말 부럽네요.


[지하 1층]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며 반 층을 더 올라가면 드디어 출구가 눈앞에 보입니다. 규모만 보면 한 대여섯 개쯤은 되어 보이는데, 출구가 세 곳밖에 나 있지 않습니다. 물론 밖으로 나가도 반쪽은 미군기지가 있어 출구가 있어도 쓰일 일은 크게 없어 보입니다.


이 층은 한 바퀴 둘러 녹사평 근처 지역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시설들이 많이 자리했습니다. 물론 설치된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용하지 않는 시설들도 몇 개 보였습니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유튜브를 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리더군요. 잘 치다가도 잠시 뚝 끊어지더니 그 부분부터 다시 시작하고, 또 열댓 마디 진행하더니 조금 쉬어갔습니다.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처음에는 역사의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악인 줄만 알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려 보니 저쪽에 노부부께서 피아노를 치고 계시더군요. 무슨 곡인가 했는데 잘 들어보니 쇼팽의 녹턴이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스피커로 재생하는 줄 알았을 정도로 빠르지는 않더라도 한음 한음 힘 있고 감성적인 선율이었습니다. 조금 틀리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다음 음을 밟아 나가는 모습이 정말 멋졌습니다. 또 뒤에서 열심히 응원해 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칠 수 있게 되어 있는 피아노로 느끼는 최고의 감동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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