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하리는 종종 처음으로 귀신을 보냈던 날을 떠올린다. 늘 같은 자리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던 남자. 그는 낡은 목도리 하나를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눈 내리는 어느 날 남자의 시선이 향해있는 창 너머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녀를 발견한 하리가 그의 손을 잡자 그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빛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아니면 의외로 쉽게 끝날 수도 있어.”
하리는 침착했다. 아직 해주를 괴롭히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그 집에 가봐야겠는데.”
하리의 혼잣말을 들은 해주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끝이 없어 보이는 어둠과 낡은 거울, 갑갑한 먼지바람이 지금까지 생생했다.
“나, 나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너는 안 와도 돼. 위치만 알려줄 수 있어?”
방과 후는 시간이 너무 늦어 주말에 가보겠다는 다짐에 조금 안심한 해주가 교실로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 약도를 그렸다. 잘 알려진 폐가이기도 했고 세월이 흘렀지만 초등학생이 갈 정도였으니 하리가 찾기에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다른 증상은 없어?”
하리가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다이어리에 잘 끼우며 물었다.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프고 시끄럽고 가끔 이상한 말 해놓고 기억 못하는 거 외에는. 가위도 이제 금방 풀려.”
“익숙해진 거지 나아진 건 없다는 거네.”
하리의 한마디 한마디가 해주의 가슴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었다. 간지러워서 움츠러들고 싶은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꾸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감추고 싶은 해주가 책상에 엎드렸다.
“친구 죽인 년이 센 척은.”
오후 수업을 위해 교과서를 꺼내던 하리가 해주의 목소리에 그대로 멈췄다. 탁해졌던 해주의 눈빛이 돌아오고 급변한 분위기를 알아챈 해주는 입을 틀어막았다.
“호, 혹시 내가 무슨 말 했어?”
“… 아니.”
하리는 감정을 감추는 것도 능숙한지 말끔한 표정이었고 해주 혼자 수업 시간 내내 불안에 떨었다. 나한테 먼저 다가와 준 좋은 아이에게 상처를 줬나 봐. 결국 이렇게 또 혼자가 되는 걸까. 내가 그렇지 뭐. 해주에게 체념은 쉽고 안전한 방법이었지만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구해주. 잠깐 나와 봐.”
우울의 늪에 빠지려는 해주를 햇살 같은 목소리가 끌어당겼다. 대답도 듣지 않고 교복 소매를 잡은 채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힘이 생각보다 더 강했다.
“실례 좀 할게. 불편하면 얘기해.”
“뭐…하는 거야?”
조용한 복도 구석에 멈춰 선 하리가 축 늘어진 빨래를 잘 펴서 말리는 것처럼 해주의 교복 조끼를 탁탁 매만지더니 이리저리 살폈다.
“최대한 털어 내보려고.”
가느다란 몸이 휙휙 하리의 손길을 따라 흔들리며 해주가 물었다. 하리는 장난기 하나 없는 표정이었다. 큼직하고 따뜻한 온기가 머리카락, 목덜미, 어깨, 등, 허리 이곳저곳을 스쳤다.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너 하루에 몇 끼 먹어?”
하리가 자신의 손목 두께와 비슷해 보이는 가느다란 해주의 발목을 툭 건드렸다. 해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리는 당장이라도 제 주머니와 가방에서 온갖 간식을 꺼내 해주에게 먹이고 싶었다.
“곧 종 치니까 이거라도 받아.”
한입에 쏙 들어오는 미니 초코바에도 온기가 묻어 있었다. 하리의 임시 조치 덕분이었을까 마지막 수업 종이 울릴 때까지 해주는 좋은 컨디션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해주는 혈색이 조금 돌기 시작하는 뺨을 문지르며 살짝 들뜬 숨을 내뱉었다.
“내일 보자.”
시종일관 덤덤한 짝이 멀어지고 해주도 기분 좋게 교실을 나섰다. 이대로라면 집에서 저녁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나 보이네. 날카롭고 축축한 목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조금의 기쁨도 용납하지 않는 그는 어김없이 해주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심술을 부렸다. 오늘 하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도 그였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모르는 척했을 해주는 약간 오기가 생겼다.
“이제 곧 없애 버릴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잘못한 게 없었다. 인생을 틀어쥐고 흔들어대는 이 불가사의한 존재를 이해할 힘도 없었으며 그저 편하게 잠을 자고 싶어질 뿐이었다. 해주는 낄낄대기 시작한 그를 무시하며 걷는 속도를 올렸다.
주말까지는 해주에게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학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고 자신을 피하지 않는 하리의 눈빛이 무척 힘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고 더 먹고 건강해지려는 해주의 모습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악몽과 가위눌림은 여전했으나 이전만큼 괴롭지 않았다. 정말로 봄이 온 것 같았다.
“하리야!”
“일찍 왔네.”
며칠이나 됐다고 하리가 내미는 초코바를 받는 폼이 퍽 자연스러웠다. 피부가 조금 반질반질해졌나. 하리의 눈에는 여전히 비실비실한 해주였지만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도 또렷해졌다.
“정말 같이 가도 괜찮겠어?”
“응.”
해주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가 매일 영혼들을 털어내 준 덕분에 컨디션도 좋았다. 하리에게 보답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해주는 용기를 내어 폐가에 함께 가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하리도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되겠지 하며 해주와 동행하기로 했다.
저 멀리 유독 짙은 색의 작은 산이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둘은 이런저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목적지로 향했다.
하리의 의견에 따르자면 옛날부터 산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었다. 누군가는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이고 미숙한 존재가 온전해지는 길이라고 믿었으나 대부분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럼 귀…신 같은 건?”
“글쎄. 우리보다는 죽음에 가깝지만 그들도 죽음이 뭔지는 정확하게 모를걸?”
“어렵다.”
“확실한 건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거지. 무언가가 그들을 붙잡고 놔주지 않으니까 그걸 알아내야 하는 거야. …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해결해 왔어.”
눈앞이 아닌 먼 과거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자신보다 이 존재들이 익숙할 테니 해주는 온전히 하리를 믿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하리가 해주의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저기야.”
해주의 손끝에는 오래된 집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험한 것들을 꽤 본 하리도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해주를 뒤로 보내고 앞장선 하리가 대문에 다가섰다. 비명 같은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한참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는지 마당에 자란 풀이 종아리를 간지럽혔다. 풀잎과 줄기 하나하나가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같이 왔던 친구들은 괜찮았어?”
“응….”
지금은 모두 연락이 끊긴 얼굴들이 떠올랐다. 중학교 입학식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지민은 해주의 상태를 보고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냈었다. 상념을 털어버린 해주가 하리의 뒤를 쫓았다. 나무 문은 여전히 쉽게 열렸다. 하리는 문고리를 잡고 유심히 들여다봤다.
“탄 것 같은데.”
어렸을 때는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만 해서 몰랐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건물 바깥에도 여기저기에 까맣게 탄 흔적이 있었다. 해주가 오싹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리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저택 안을 빠르게 둘러본 다음 곧장 2층 계단 앞에 섰다.
“굳이 해주 너한테 붙은 이유가 있을 거야. 예를 들면 혼자 넘어져서 피를 봤다거나.”
하리가 가리키는 곳에 핏자국 같은 작은 얼룩이 보였다. 해주의 기억 속 그날이 눈앞에 그려졌다. 2층 복도 끝 거울 앞에서 낯선 여자를 보고 뛰어 내려온 아이들. 누군가의 손길에 붙잡힐까 봐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리다 넘어졌던 순간.
잠깐, 그때 내가 단순히 발을 헛디뎠던가?
“구해주. 혹시 이거 네 거야?”
고민에 빠졌던 해주가 어느새 계단 중간쯤까지 올라간 하리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움직였다. 하리는 작은 구슬 장식을 들고 있었다. 머리끈이나 핀에 달려있을 법한 모양새였다. 어딘가 익숙한 장식을 천천히 들여다본 해주가 눈을 크게 떴다.
“내꺼 맞아!”
해주는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에 허우적거리며 머리카락을 강하게 잡아채던 손길을 떠올렸다. 투둑하고 뜯어지던 것은 계단에 걸린 코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나, 그냥 넘어진 게 아니었어.”
“피도 흘리고 물건도 두고 왔으니 이런 게 붙을 수밖에.”
하리는 귀신들이 어떤 집착이나 미련의 집합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이승에 남겨둔 게 있으니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주면 대부분 사라지는 거야.”
그들이 남긴 것들의 대부분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물건이 없어도 말로 미련을 풀어놓고 나면 어느 정도 해소가 된다는 것이 하리의 이론이었다.
“그럼 나한테 붙은 건….”
“얘길 한번 들어보자고.”
성큼성큼 계단 끝까지 올라가는 하리는 침착하고 듬직했다. 해주도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