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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Mar 01. 2024

세 대의 카메라, 4일의 밴쿠버 #2

Day-2




알람이 울리자마자 곧바로 눈을 뜬 나는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르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였는 지는 모르겠지만 D는 먼저 일어나 태블릿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곧바로 커튼을 열어젖혀 날씨를 확인했지만 역시나 하늘은 계속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창문에는 바람결에 날린 빗방울들이 튀겨져 있었다. 바로 가도 되냐는 D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복은 아니었지만 잘 때 입으려고 가져온 스포츠용 7인치 반바지를 몸에 걸치고 샤워가운과 슬리퍼를 추가로 무장한 채 두 한국인은 방을 나서 5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옆에 붙어있던 헬스장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 명은 트레드밀에, 또 다른 한 명은 웨이트 기구에 몸을 올려놓고 있었다. 야외로 나가는 문을 열자 온탕에서 올라오는 습습한 스팀과 찬 기운을 잔뜩 머금은 빗줄기들이 둘을 맞이해 주었고, 옆에 비치되어 있던 작은 원형 테이블과 의자에 각자의 물건들을 놓아두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시x 이거지." 



오랜만에 몸이 녹아들어 가는 듯한 이 느낌에 1년 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근육의 긴장들이 잠시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3분의 1 정도 드러나 있던 상체와 머리에 떨어지는 물방울들도 이때만큼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이른 나이에 캐나다로 넘어와 자랐지만, 나의 앞쪽에 앉아 전형적인 한국인 아저씨들과 같은 포즈와 반응을 보이는 D를 보니 이 친구도 정말 영락없는 한국인이구나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10분마다 나란히 붙어있던 2개의 물웅덩이를 옮겨 다니면서 몸을 데웠다 식혔다 하다 보니 평소에 아침을 잘 먹지 않았던 나 조차도 약간의 시장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직 A를 만나기까지 시간이 남아있어서 D에게 어제 갔던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을 때우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그 또한 좋은 아이디어라며 온탕에서 몸을 끄집어 내 걸쳐놓았던 가운을 다시 몸에 둘렀다. 



아파트먼트보다 오피스 빌딩들이 대거 몰려있던 지역이었지만 사람들은 주문을 위해 일찌감치 줄을 서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진열되어 있던 빵들을 보면서 어떤 것을 택할지 잠시 고민을 했고, 각각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포함된 BLT 샌드위치와 그릴드 치즈 세트를 결제한 뒤에 한쪽에 남아있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A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얼마 안 가서 그 또한 도착해 다시 뭉친 세 사람은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1km 정도 떨어져 있던 차이나타운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을 나아가면서도 이 정도 강수량이면 취소가 되지 않을까 했지만 이런 날씨가 일상이었던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거리 초입부터 모든 곳들이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사실 우리 모두 행사라고 해 봤자 캘거리와 비슷한 규모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비교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거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3시간 뒤에 다시 모이자는 말과 함께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서로 방식이 너무 달라서 같이 뭉쳐봤자 마이너스만 될 것 같다는 게 나의 의견이었다. 첫 만남이었던 차이나타운에 길조차 제대로 몰랐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음을 구해가며 크게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나서 사람들 속으로 본격적으로 파고들었고, 전날 밤과는 상반된 상태의 심박수를 가지고 셔터를 눌렀다. 친구들은 이런 소란이 그리 달갑지 않았겠지만 본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둘째 날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저기, 이거 되게 진부한 말처럼 들리는 거 아는데, 혹시 네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나는 원래 포트레이트 사진은 잘 안 찍는 편인데 네 스타일이 되게 마음에 들어서 물어봤어."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너도 여기 사는 데 오늘 구경 나온 거야?"



"아니. 나는 작년부터 캘거리에서 지내고 있다가 잠깐 여행 차 어제저녁에 이곳에 도착했어. 고향은 한국이고. 곧 돌아가는 데 친구들이랑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 왔다고 할 수 있겠네." 



"밴쿠버에 온 걸 환영해! 아주 딱 맞는 날씨에 이곳을 찾아왔네 하하. 여기 서 있으면 되겠니? 네가 원하는 위치에 설게!" 




그저 캘거리 사람들이 만들어 낸 장난 섞인 말이라고 치부했지만, 그들이 종종 나에게 했던 "캘거리는 사람이 좋고, 밴쿠버는 날씨가 좋다."라는 문장 때문에 이 도시에서 물음을 구하고 촬영을 하는 데 약간의 심적인 부담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의 스타일은 그런 고민을 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말을 건네게끔 만드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고, 운이 좋게도 내가 4일 동안 머물며 허락을 던졌던 모든 사람들은 내 카메라 앞에 자리를 해 주었다. 날씨는 정말 짓궂었지만 이런 작은 인연들 덕분에 밴쿠버는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내 마음에 크게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구역 자체는 한정적이어서 돌아다니다 보니 친구들을 계속 마주할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움직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 손에 에그타르트를 들고서 지나가는 퍼레이드 행렬이나 구경할까 한다고 했던 A와, 조금 위쪽에 올라가서 구도를 잡아본다고 했던 D를 보고 나서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니 조금씩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오후 3시 정도가 되어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헤어졌던 장소에서 다시 모였다. 이번에도 메뉴의 결정은 D의 몫이었다. 상당한 미식가였기에 남은 두 사람이 딱히 의견을 내비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의 초이스들은 항상 높은 만족도를 도출해 냈다. 더군다나 그가 골랐던 일본 라멘집이 바로 근처에 있어서 시간과 체력 모두 세이브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후 일정들을 소화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제 어디 갈래? 너 가고 싶은 곳 있어?"



"음.. 어차피 우리 모두 조금 지쳤으니까 바로 붙어있는 Powell Street 까지만 갔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거 어때? 쉬었다가 다시 나와서 저녁 먹고, 또 괜찮으면 야간에 잠깐 사진 찍어도 괜찮을 듯 해."



"저녁 메뉴는 내일 돌아가니까 A, 네가 골라라." 



"난 이미 정했어. 초밥 먹자." 




한껏 젖은 우산에 붙은 물방울들을 몇 차례 털어낸 뒤에 우리는 다시 축축한 거리에 발을 디뎠다. 식당에서 바로 다음 블록에 위치해 있던 East Hastings 거리는 많은 홈리스들이 상주하고 있어 몇 블록 더 너머에 있던 Powell Street로 가자고 한 거였는데, 거리상 가까운 것도 이유였지만 최근 몇 주 전부터 봤던 Fred Herzog 작가의 사진들이 인상 깊어 온 김에 한번 들리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40년이 넘게 지난 기록들과 지금 현재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는 컬러를 주로 사용했던 그와 다르게 '나' 흑백의 시선으로 어떤 사진을 한국에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지 한번 시도나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확실히 어제 갔었던 Granville Street 보다는 오래된 느낌이 구석구석 묻어나 있는 거리였다. 캐나다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까지 특이점이 오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었으니 캘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재미난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감정은 사거리 앞쪽으로 기다랗게 나 있던 기차선로와 풍경들에서 살짝 채널이 바뀌었다. 나 또한 아직까지도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양쪽으로 다르게 보이던 풍경들을 한 장씩 찍고 나니 기분이 약간 울적해졌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날, 이 시간, 이곳에 온 게 정말 다행인 것만 같았다. 장면에 딱 맞는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상하게 이 장소만은 유독 그렇게 느껴졌다. 나름 오래 이 나라에서 생활을 해서 한국인 물이 많이 빠진 줄 알았는데, 항구 쪽 크레인을 찍기 전에 D에게 허락 없이 저 장소를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을 때는 곧바로 한국인 모드에 전원이 ON으로 바뀐 것 같았다. 이걸 왜 찍으면 안 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던 그의 얼굴이 오버랩된 것 또한 이 날 있었던 재미난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Gas Town 쪽으로 가서 커피랑 화장실 좀 들리자는 친구들의 말에 아까와는 조금 다른 경로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번잡스러운 분위기가 다시 눈에 들어왔고, 관광객들은 김이 나오는 시계탑 근처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저게 무슨 개떡 같은 관광스폿이냐며 퉁퉁거리던 D의 말에 나 또한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일 정도로 너무나 아담한 사이즈였다. 안쪽에 자리가 여유로웠던 한 카페에 들어가 각자의 음료와 용무를 끝마친 우리는 아까 이야기했던 대로 호텔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서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잠깐만 잘 테니 시간 되면 깨워달라는 말을 하자마자 곧바로 곯아떨어진 D 옆에서 나 또한 눈을 붙일까도 했지만, 간단히 샤워만 하고 누워서 유튜브 영상들을 돌려보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둘 다 잠에 들면 이대로 새벽까지 뻗어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7시에 깨우려 했지만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에 빠져있던 그의 모습을 보고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고, 그렇게 둘은 9시가 조금 넘어 다시 채비를 마치고 방을 빠져나왔다. A도 많이 피곤했었는지 퉁퉁 부은 얼굴을 띄고 있었고, 이 시간에 열었던 식당들 중에서 가장 평점이 높았던 곳을 골라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아까 점심에 먹었던 라멘집 바로 뒤에 있는 곳이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다시 한번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섰다. 해산물 퀄리티가 그렇게 좋다길래 한껏 시켰던 사시미와 초밥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가벼운 지갑사정과 높은 가격들이 많이 아쉽게 느껴졌지만, 나와 D에게는 아직도 6번의 기회가 남아있었기에 빨리 털어낼 수 있었다.



차례가 돌아와 이제는 내가 몹시도 피곤했지만 반대로 에너지가 다시 돌기 시작한 둘은 이곳과 사이언스 파크까지 둘러보고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조금 더 힘을 내 다 같이 한 바퀴를 돌았다. 사실상 이름은 '차이나타운'이었지만 모든 아시안 문화의 집결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 지역은 낮과 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쏟아지는 비에 적셔진 네온사인에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거리라.. 낭만은 최고치에 도달했지만 체력은 그에 반비례하여 바닥을 기고 있었다. 




사이언스 파크 쪽에서 호텔까지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렸던 탓에 근처에서 열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꽤나 터프한 날씨였음에도 이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했다는 것은 꽤나 큰 성과였다. 몇 정거장을 거쳐 Granville 역에 내렸고, 다시 어젯밤에 헤어졌던 장소에서 두 번째 밤을 마무리했다. 혹여나 다시 밖으로 나올 여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이틀 만에 단골이 된 카페에서 빵 몇 개를 구매한 우리는 내일은 좀 날씨가 나아지려나 하며 걱정 반 기대 반으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던 호텔로 돌아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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