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보슬 내려서 봄비는 더욱 가냘픈 새싹 마냥 좋다. 요란스럽지 않고 살금살금 찾아와 주어서 더더욱 좋다.
비꽃이 조용히 내리더니 어느새 꽃비가 되어 내린다. 남아있던 벚꽃 잎을 데리려 왔나 보다. 친구가 필요했을까? 그것도 아름다운 친구가. 바닥은 온통 빨갛게 덮인 꽃잎 목욕탕인 듯하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은 졸졸 흐르는 물 위에 꽃배를 띄우고 친구 따라 멀리 떠나려나 보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며 친구들과 세월을 따라 흘러간다. 내 눈길도 그들과 함께 서서히 멀어져 간다.
요즘 공원에는 울타리를 장식하던 개나리와 조팝나무꽃들이 서서히 잎순을 내밀기 시작한다. 드디어 자기들의 시간이 되었다는 듯 쭉쭉 뻗은 가지가 초록 잎을 달고 자라기 시작하고 있다. 그 곁에선 황매화와 죽단화가 노란 꽃잎을 펼치며 뽐내고 있다. 또한 벌써 겹벚꽃들이 화려한 모습으로 봄날을 재촉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명자나무 꽃이 나도 봐달라는 듯 함께 하고 있다. 여기저기 꽃천지인 지금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다.
수세를 자랑하는 느티나무는 초록색 이파리들을 가득 담았다. 우아한 초록 가지들을 활짝 펼친 잘 생긴 모습으로 넓은 공간을 독차지하고 서 있다. 부드러운 봄햇살을 혼자만 다 받아갔나 보다. 감히 누가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작은 꽃들을 달고 서 있다가 비에 얌전히 살포시 내려보내나 보다. 바닥 가득 질퍽거릴 정도로 떨어져 질펀한 쓰레기가 되어가는 것 같다. 뭐든지 넘치는 건 안 좋은 것 같다. 다다익선이라고 하지만 너무 많아 번식에는 좋을지 몰라도 귀한 대접은 못 받는다. 과유불급이다. 느티나무 꽃을 보면 항상 그 생각이 든다. 너무 많다. 많은 열매를 맺는 건 꽃이 작기 때문이다. 대신 별로 예쁜 것 같지 않아도 귀한 종자들, 결국 번식이 더딘 종자들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예쁜 야생화들도 너무 흔해 그냥 이름도 불려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많다.
요즘은 예쁜 꽃들이 너무 많다. 다들 개량해서 만들어 내니 장미라고 하면 붉은 장미만이 아니고 흰 장미, 흑장미 등등이 있듯이 끝이 없이 교잡해서 새로운 식물들이 나온다. 홑꽃들이 다들 겹꽃이 되어 나오고, 색상도 바뀌다 보니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고 긍지를 가졌지만 요즘 혼혈은 그냥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자연스럽듯이 말이다. DNA변형이 쉬운 꽃들은 더 많은 종류로 다변화되어가고 있다. 종이 다양화 되어가는 것은 권장 사항이지만 원래 고유한 우리 것이 잊히는 것이 아닐까 염려스럽기는 하다.
단아한 명자나무꽃
우리 조상들은 매난국죽을 사랑하였듯 항상 꽃과 함께 생활하는 선비의 삶을 살았다. 사계절 꽃을 보며 살며 아들을 낳으면 회화나무를 심고,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듯 식물은 삶 속에서 가장 밀접한 대상이었다. 과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꽃으로는 명자나무꽃이었다. 뒷마당 한쪽에 빨강, 분홍, 흰색의 아담한 꽃이 초록색 잎을 달고 가지에 달려 살랑거리면 공부하던 젊은 선비들은 책을 덮고 긴 한숨을 내쉬며 유혹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것은 처녀만이 아니었을 터. 그래서 양반집에서는 집안에 명자나무꽃을 심지 말라고 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양반집에서는 자라지 못한 꽃이 되었다. 보통 산당화라고도 했지만 지금은 명자나무로 통일되어 있다. 조상님들 들어오지 못하신다고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고, 지조를 잃지 않으려고 버드나무를 심지 않았듯 명자나무는 아직 과거를 보지 않은 아들들을 위해 집안에 심지 않았다.
명자나무꽃은 단성화이다. 보통 꽃은 암술과 수술이 함께 들어있는 양성화이지만 일부 꽃은 암술 혹은 수술만으로 이루어진 암꽃과 수꽃 2종류의 꽃을 피우는데 이를 단성화라고 한다. 흔하지는 않지만 간혹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붉은색이 많지만 분홍색과 흰색꽃도 볼 수 있다.
명자나무는 낙엽관목으로 장미과의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보통 집 주변에서 볼 수 있는데 키가 작고 관상수로 심기도 하고 산울타리로도 많이 심어지고 있다. 봄이 무르익어가는 4~5월에 화려한 모습으로 피는데 어찌 보면 매화꽃 같기도 하다. 꽃말은 아담한 모습의 꽃이 잎과 함께 다소곳이 피어서인지 겸손, 신뢰, 수줍음이라고 한다. 온실에 가면 꽃 분재로도 있는 걸 볼 수 있다. 열매는 작은 모과처럼 향기를 내고 주렁주렁 열리지만 가을 익을 때 보면 누렇게 몇 개만 남고 대다수가 떨어지고 없어진다. 모과처럼 가래를 삭여주는 약재로 많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