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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초향 Oct 21. 2024

너를 만나기가 그리 어렵더냐

으름덩굴

눈 깜짝할 사이를 ‘찰나’라고 하고, 숨 한번 쉬는 시간을 ‘순식간’이라고 한다. 또한 이 찰나들이 모여 ‘겁’을 만든다. 수많은 겁이 만나야 인연이 된다. 겁이라는 무한한 시간이 모여 인연을 만들어 우리는 서로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이고, 연은 인을 돕는 외적인 간접적인 힘을 말한다. 인연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동물에게도, 식물에게도 인연은 닿아있을 것이다.    

 

우리 집 강아지 토리도 몇 번의 헤어짐이 있을 뻔했지만 결국 우리 집에 와서 지금까지 가족처럼 지내고 있음도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순간들이 어쩌면 실로 연결되듯 이어온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인연들을 위해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염원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라는 믿음. 난 그 믿음을 근래에 식물에게서 느꼈다.  

   

내가 아주 젊었을 때 30여 년 전 동네 야트막한 산을 산책 삼아 자주 다니곤 했다. 산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몸도 별로 건강하지 못해 마지못해 끙끙 다니던 길이었다. 매번 가는 길이었지만 어느 날 눈에 들어온 나무가 보였다. 숲 속의  덩굴들 속에 처음 보는 특이한 잎을 가진 덩굴이 보였다. 작은 잎들이 5~6개가 모여나 있는데 모양이 달걀형으로 아주 예쁘게 보였다. 딱 그곳에서만 보이는 어린 덩굴이었는데 길이도 얼마 되지 않았다. 두세 번을 더 다니며 눈여겨보게 됐다. 식물에 별 관심도 없을 때니 당연히 이름은 몰랐다. 계속 눈에 밟혀 어느 날인가 모종삽과 큰 가방을 들고 산책을 나갔다. 우리 집도 남향집이어서 베란다에 햇볕이 쑥 들어와 다른 화분들도 제법 잘 크고 있었다. 마침 빈 화분이 있어 그 나무를 캐오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무식이 용감했다. 지금에야 그런 무모한 짓을 절대 안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지저분한 덩굴 속보다는 깨끗한 우리 집 베란다에서 크는 것이 더 나을 것도 같았다.  1미터도 안된  어린 덩굴을 흙과 함께 가져와서 베란다 화분에 심어 두고 온 정성을 다 했지만 옮겨 온 날부터 한 번도 웃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대로 말라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나무 이름은 몰랐지만 정확하게  잎은 기억하고 있었다. 산에서 나무를 옮겨와서 심어 본 것이 처음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산에서 자라는 것이 집으로 와서 자란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 뒤였다. 식물들도 약육강식에서 예외는 아니다.

 

세월이 지나 서울숲이 만들어지고 숲 해설을 주말마다 그곳에서 하게 됐다. 서울숲 입구 파고라의 기둥이 있는데 그곳에 익숙한 덩굴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직 덩굴이 자라기 시작해서 기둥에 몇 줄기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그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잃었던 물건을 찾은 듯 너무 반가웠다. 근 15년이 더 지났지만 잎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봤다. 이름이 으름덩굴이라는것도 그때 알았다. 햇볕이 제일 좋은 곳에 자라고 있었지만 튼실하지 못하고 꽃이 몇 개 피고 보이질 않았다. 매주 갔지만 제대로 꽃다운 꽃을 보지 못하고 2~3년이 흘러갔다. 열매는 당연히 한 번을 보질 못했다. 지금은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 능소화에 치여서 자라지 못하는 것 같다.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항상 아쉬움이 남아있는 으름덩굴은 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3년 전 올림픽공원을 갔는데 그곳의 파고라에 으름덩굴이 뒤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꽃이 휘들어지게 피어있었다. 잎을 본 뒤로 30년이 되어서야 꽃다운 으름덩굴을 보게 됐다. 암수한그루지만 암꽃과 수꽃의 모양이 전혀 달라 한 나무에서 두 꽃을 보는 듯하다. 수꽃은 작고 꽃차례 끝에 4~8개씩 모여 달리고 수술이 연보라색 꽃잎보다 짧다. 암꽃은 수꽃보다 훨씬 크고 1~2개씩 모여 달린다. 다른 꽃과 달리 암, 수꽃의 모양과 크기가 달리 한 채 한 나무에 달리는 독특한 모양과 연보라 색상이 더욱 예뻣다. 이 많은 꽃들이 지고 나면 열매가 무지 많이 열릴 것이라 여겨 몇 주일을 가봤지만 그 많은 꽃들은 수정을 못했는지 열매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이 어름덩굴을 다 보는 것이 참 어려웠다.    


암꽃


수꽃

 

내가 으름덩굴 보기가 그리 어렵냐고 한탄을 했더니 지인이 서울에서 으름덩굴 열매를 보려면 창경궁으로 가라고 한다. 창경궁을 내가 수십 번을 갔는데 으름덩굴을 본 적이 없었다. 식물원 뒤로 돌아가면 으름덩굴 열매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식물원 뒤쪽 구석 작은 공간에  거짓말처럼 숨어있었다 . 난 그곳에서  잎을 본 뒤로 15년 만에 꽃을 보고 그 뒤 15년 만에 열매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주렁주렁 작은 수세미처럼 매달린 열매를 보니 허탈했다. ‘내가 너를 만나기가 그리 어렵더냐’ 7월 중순에 갔을 때에 작은 바나나 같은 모양이 단단해 있었다. 10월 초에 가니 조금 말랑거리고 살짝 세로로 갈라져 과육이 보였다. 눈을 딱 감고 하나를 따왔다. 먹어 보고 싶었다. 집에 뒀더니 제법 말랑거리게 되어 먹었더니 부드러운 달콤한 맛인데 흑임자 같은 까만 씨앗이 과육 안에 가득 들어있어 먹을 게 없었다.


30년 동안 내 머리속에 남아있던 으름덩굴을 올해야 처음으로  잎이 나고 열매를 맺힐때까지의 전 과정을 다 보게됐다.

뭐든 간절히 원하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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