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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초향 Feb 06. 2024

라떼는 명절에~~

함께 모여 명절 음식 만들던 그 시절이 그립다.

정말 별 볼 일 없이 또 한살이 먹더니 벌써 한 달이 또 흘러갔다. 기적소리 힘차게 내며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에 탑승되었는지 세월은 그렇게 잘도 간다. 매년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한숨소리가 땅을 꺼지게 하더니 드디어 올해는 한숨소리가 멈췄다.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하던 연말의 달력은  올해는 조금은 안정된 맘으로 벽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새해의 달력을 걸 수 있었다. 이런 행복한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큰 덕은 우리집에 며느리가 들어온 덕분이다. 나이를 꽉 채우다 못해 넘쳐 결혼한 아들이 한결 편안해하고 매사에 행복해하니 나도 덩달아 여유로워졌다.


신혼여행 후 한 달 만에 또 시댁에 와야 하는 며느리 입장에서 불편할까 봐 설 전날 저녁 먹을 때에 오라고 했다. 사는 곳이 대구이고 대구가 친정이니까 들렸다가 늦게 오라고 했다. 인테넷에 명절만 되면 며느리들의 시댁 성토가 시작되는 글들이 올라온다. 명절 스트레스란 말을 하두 들어서 엄청 신경 쓰인다. 집집마다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많은 명절은 진정 명절이 아닐것이다.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 한다고 하는데 실감이 난다. 난 인제 시어머니 입장이 되어 보니 그렇다.  저번 주일 내내 집안 청소와 집 정리를 했다. 며느리가 온다 하면 긴장한다고 하던 친구들 말이 떠오른다. 부엌살림을 이것저것 정리하고 집안 구석구석 청소하려면 정말 스트레스받을 정도라고 한다.  음식 만들어 몇 끼 먹고 가면 아프다고 한다. 손주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도 실감이 난다.  아들방의 침대와 이불을 다시 정리하고, 결혼식 때 사진도 크게 가리개로 인화하여 벽에 걸어뒀다. 최대한 시댁에 오는 걸 스트레스받지 않길 바라는 맘이다. 특별한 일이 있다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수없이 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는 한다.


내가 결혼해서 설 명절에 되면 시댁에 1~2주일 전에 내려갔다.  서울에서  시골까지 버스를 타고 아이를 데리고 먼저 내려갔다. 기차를 타고 가면 좋았지만 표 사는 것도 전쟁이었다. 서울역에 가서 몇 시간 줄 서서 기다리는 것도 만만찮았다. 직장 생활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먼저 내려가고 남편은 명절 전날 내려왔다. 설 때는 눈이 오면 버스가 막혀 통상 10시간이 걸렸다. 20시간 넘게 걸린 적도 있었지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시댁을 내려갔다.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다녔던 것 같다.  차 안에서  아이들이 울면 다들 나서서 챙겨주는 정들도 있었고, 차가 눈에 쌓여 못 가면 남자들은 나가 차를 밀기도 했는데 그땐  왜 그리 눈도 많이 내렸는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내려간 걸 보면 나도 꽤나  순종적이었나 보다.


내려가면 집성촌이여서 동네 친척 형님들이 무지 많으셨다.  지금에야 그분들은 다들 돌아가셨지만 서울에서  잘난(?) 조카며느리가 왔다고 엄청 챙겨주시던 정 때문에 부담 없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왁자지껄 떠들며 함께 음식 해서 집으로 가져가시곤 하셨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시댁에서 함께 모여했다. 친정은 도시였고 엄마가 명절이라고 딱히 음식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부지런한 시어머니는 정말 많은 음식을 했다. 언제 가던지 상다리가 부러지게끔 상이 차려지곤 했었다. 지금에야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2주일 전부터 음식 장만을 시작했다. 짚 태우고 남은 재를 시루에 깔고 불린 콩을 넣어 수시로 물을 주며 까만 보자기를 덮어두면  시루가 터지도록 콩나물이 소복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명절음식이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점점 많이 광에 쌓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귀한 간식인 산자와 강정을 따뜻한 방에 둘러앉아 제일 먼저 만들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밀고 당기고 기름에 튀기면 커다랗게 만들어져 나온 하얀 산자를 쌀 튀김에 버무려 큰 광주리 몇 개에 가득 담아 시원한 광으로 옮겨 간다. 그리고  어느 날은 밀가루를 얇게 밀어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가운데에 칼집을 내어 뒤집어 기름에 튀긴 후 꿀을 발라 타래과를 한 바구니 만들었다. 가장 맛있는 것은 모찌였다. 지금도 난 모찌를 잘 사다 먹는다.  맷돌에 콩을 갈아 간수를 넣어 두부를 만들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시원한 물에 담가 둥둥 띄어두면 위에 살짝 살얼음이 올라와 있었다. 힘들었지만 맛있는 명절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지면 피곤도 잊고 즐겼던 시절이었다.  요즘 그런 얘기를 하면 먼 옛날 소설 속의 풍경 같다고 한다.


인테넷에서 따옴 - 꼭 이렇게 앉아서  만들곤 했다



내가 결혼한 지가 43년 차이다. 그 세월이 참 길었나 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은 명절 풍경이 그리운 건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온갖 정성을 다 하시며 음식을 하시던 시어머니를 생각하고 명절이면 제사를 정성껏 모셨다. 그런데 며느리가 들어오면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던 약속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다. 남편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어 명절 앞두고 별 걱정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바쁘고 멀리 떨어져 사는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며느리이기에 더 신경이 쓰인다. 난 제사 음식도 만들면 산 사람이 먹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들고 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제사가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이럴까 저럴까 맨날 얘기만 하다 명절이 코앞에 와 버렸다.


 #설명절 #산자와강정만들기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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