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백조의 발

우아함에 대한 오해

by Ondo fiftytwo

5화를 올리고 나서, 나는 선언했다.

이제 멍을 때리기로 한다고.

빽빽하게 채우는 대신, 둥둥 떠다니기로 한다고.

삶은 그 선언을 읽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 날부터 회사가 바빠졌다.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했고,

대학원 개강과 함께 박사 수업도 시작됐다.

달력은 순식간에 빈칸을 잃었다.

몸이 바빠지자, 마음도 따라 바빠졌다.

처음엔 잘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내 행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만 걷는 걸음.

커피를 사면서 카운터 너머의 사람과

눈을 맞출 여유가 사라졌다.

매일 하던 친정엄마와 시어머님께 드리는

안부 전화도, 어느 날부터인가 잊어버렸다.

까먹은 게 아니다. 밀어낸 거다.

모르는 척, 나중에, 내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은 잘 됐다.

마감은 지켜졌고, 보고서는 빠르게 완성됐다.

회의에서 집중력이 높아졌고, 결정도 빨라졌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2주였는데,

생산성만큼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래서 잠깐, 생각했다. 이게 맞는 건가.


효율적인 사람이 되는 건 분명 능력이다.

시간을 아끼고, 에너지를 아끼고,

최소한의 투입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내는 것.

사회는 그걸 미덕이라 부른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뭘 위한 효율인가.


커피집 직원의 눈웃음에 잠깐 멈추는 것,

엄마 목소리를 3분 듣는 것,

퇴근길에 하늘 색깔을 확인하는 것.

그것들이 잘려나간 자리에 생산성이 들어섰다.

숫자로는 이익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뭔가를 잃은 기분이 들었을까.


효율은 일상의 여백을 먹고 자란다.

그 여백이 낭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목적 없이 웃고, 아무 이유 없이 전화하고,

아무 계획 없이 걷는 것.

그게 없어지자, 나는 더 잘 돌아가는 기계가 됐지만,

나이기를 조금 잃었다.


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비효율로 이루어진다.

미술도, 음악도, 효율과는 거리가 멀다.

화가는 같은 풍경을 수십 번 다시 그리고,

연주자는 한 소절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수백 번을 반복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중 하나다.

5분이면 될 일이 30분이 되고,

어제 가르쳐준 걸 오늘 또 가르친다.

계획도, 예측도, 효율도 없다.

그런데 그 시간이 가장 오래 남는다.


어쩌면 비효율은 낭비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자라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선택하고 싶다, 이 비효율을.


엄마 목소리 3분, 카운터 너머의 눈웃음,

걸음을 늦출 수 있는 여유.

그것들이 나를 덜 생산적으로 만들더라도,

그게 내가 지키고 싶은 일상이다.


백조를 생각했다.

흔히 백조를 이렇게 비유한다.

수면 위는 우아하지만,

물 아래에서는 두 발이 쉬지 않고 젓고 있다고.

겉은 고요하고, 속은 분주한 존재.


나는 반대를 원했다.

겉이 바빠도 좋다.

주말에 출근하고, 수업을 듣고, 마감을 쫓아도 좋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수면 위처럼 고요하고 싶었다.

몸은 바쁘게 발을 젓더라도,

마음은 천천히 물 위에 떠 있고 싶었다.


마음대로 안 됐다.

발이 바빠지자 수면도 출렁거렸다.

그 출렁임이 싫었다.

우아하지 못한 내가 싫었다기보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과

실제 내 모습 사이의 간격이 낯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출렁이면서도 백조는 앞으로 갔다.

완벽하게 고요하지 않아도,

발이 보일 만큼 허둥댔어도, 결국 헤엄은 쳤다.

그리고 2주가 지나,

나는 다시 여기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백조의 발이 보여도 괜찮다.

수면이 출렁여도 괜찮다.

비효율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지키면서,

오늘도 앞으로 가고 있으니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