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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y 11. 2024

타자기 시대의 종말

디지털 시대의 손글씨 4

1.


나보다 서너 살 위인 형에게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 그때 일이라면 나보다 형이 더 잘 알고 친숙할 텐데 말이죠. 형은 혹시 타자기를 사용해 보았는지요. 학창 시절에 형은 거의 언제나 도서관과 강의실만 오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 마당에 굳이 자취방 안에 타자기를 사놓고 썼을 리 없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봅니다. 하여간 오늘은 나의 손글씨에 이어 타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 겁니다.


손글씨로 한글을 잘 쓰는 사람은 영어 글씨마저도 잘 쓰더군요. 손글씨로 한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영어 알파벳마저 엉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손글씨 솜씨는 글씨의 국적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 손재주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기술에는 으레 원래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고, 나아가 오랜 연습과 숙련 과정이 요구됩니다.

 

하여, 대학 재학 중 미국으로 이민 온 후에도 나의 손글씨의 불행은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는 한글을 넘어 영어 알파벳으로!


한글이 아니라 알파벳으로 써도 글씨를 못 쓰는 것은 동일합니다. 주로 딱딱하고 네모나게 생긴 내 영어 글씨를 보더니 내 친구가 깔깔거리면서 말했습니다.


"이게 니가 쓴 거야? 그림 그린 거 아냐? 이거 정말 초등학생이 쓴 글씨 같다."


그래서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나는 수업 중에 필기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교수가 떠드는 영어를 잘 알아듣지도 못했으므로 받아 적을 수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교수가 칠판에 적은 것만 보고 따라서 내 공책에 적었지요. 그 외에 주로 옆에 앉은 학생의 노트를 보고 겨우 필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나는 착한 흑인 친구 옆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공책에 가끔 '초승달'을 그리곤 하던 것을 보아, 조금 더 지난 후에 나는 그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블랙 무슬림!


물론 그때는 지금 내가 이해하는 정도로 무슬림이나 이슬람에 관해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평등한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해 대단히 진보적이고 전투적인 '블랙 무슬림'이 있다는 것을 얼마 후에 알게 되었지요. 지금은 미국사회가 적어도 흑인들의 인권 문제에 관해서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된 상황이지만, 그래서 그때처럼 흑백 간 미국인들의 갈등이 심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흑백 인종 문제는 미인들에게 매우 심각한 갈등의 소재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뒤집으려는 지각 있는 흑인들이 특히 무슬림으로 몰려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여간 그들은 미국에 있는 흑인,  나아가 유색인종 또는 마이노리티(소수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백인 집권층은 그들의 '과격성'과 '폭력성'을 홍보하고 공격했지요.


나의 클래스메이트인 그 무슬림은 매우 점잖고 착한 친구였고 내가 매일 묻는 질문을 잘 받아주긴 했지만,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도 못하고 필기도 못하는 아이가 아시아의 어느 조그만 나라에서 미국까지 와서 고생하는 꼴을 보니 참 불쌍하다고!


그때는 정말 대부분의 미국인이 '사우스 코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영어로 버벅거리는 나를 보고 그들은 먼저 "어디에서 왔느냐?"라고 묻고,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곧바로 다시 '사우스 코리아'냐 아니면 '노스 코리아'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나는 일부러 "사우스 코리아"라고 하지 않고 "코리아"라고 대답했었지요. 지금에 비해 그때는 '한반도 통일'이라는 사회의식 또는 민족의식이 강했던 때였고, 나 역시 코리아는 '하나의 코리아'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또는 다가올 통일된 코리아를 생각했고, 미국인들에게도 그렇게 알려지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코리아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한국전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자신들이 사우스코리아에 가서 피를 흘리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잊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긴,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낯선 나라에 파병 가서 죽도록 고생하고 싸우다가 전사하고 부상까지 당해서 돌아왔는데, 나중에 그 나라 사람을 보면 말입니다. 그 잊힌 전쟁을 떠올리고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까. 나는 실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당했다는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하여간 필기에 이어서, 또 영어에 있어서, 아, 정말로, 그때 나는 영어도 못하고 필기도 못하고 미국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가련한 인생이었습니다.




2.


그 와중에, 나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는데...

한글 타자기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당시는 한글 타자기 제조회사들이 서로 다른 자판 모델을 내세워서 그랬던 모양이지만, 타자기를 위한 여러 자판 모델이 경쟁했던 듯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판 표준형은 (한국 정부에 의해?) '공병우 식' 자판이 아니라 '2벌식' 자판으로 확정되었지요. (그때까지 공병우식 타자기를 사용한 사람은 어쩌라고!)


돌이켜보면, 공병우는 일제강점기에 안과 의사였고, 해방 후에는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글기계화운동에 주력했으며, 세벌식 글자판을 개발하고 보급하려고 노력했던 분입니다. 타자기를 위한 한글 글자판은 공병우 식 세벌식 이전에 다섯벌식, 네벌식 등 여러 모델이 있었지만 모두 개량에 실패했지요.


사실 1960년대 말 박정희 정부는 네벌식 글자판을 표준으로 채택했었지만, (아마도 편리성 때문이었겠지만)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공병우 세벌식 자판기가 가장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퍼스널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전두환 정부는 드디어 두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공병우 세벌식 자판에 익숙했던 나에게 매우 큰 불편을 초래했습니다. 자판기 위에서 손가락을 놓는 글자 위치가 달라졌으므로 타자를 칠 때 자주 틀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자판 모형이 다른 자판기에서 타자해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손가락들에게 이미 익숙한 위치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를 눌러야 하므로, 이제 나는 완전히 새롭게 자판 글자 위치를 외워야 했고 손가락들을 연습시켜야 했습니다.


아무리 불평해도 소용없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두벌식 타자기가 표준 모델로 자리 잡은 마당에 나는 결국 타자기를 새로 사기로 했습니다.


두벌식 자판을 갖춘 타자기로!


다만 이번에는 수동식 타자기가 아니라 두벌식 '전동' 타자기를 구입했습니다. 수동식 타자기는 열심히 쓰다 보면 (종이의 오른쪽 여백을 지나) 줄 바깥으로 나가서 타자를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자판을 모두 외운 상황에서 눈은 타자기 왼쪽 옆에 있는 자료를 보면서 타자할 때 생기는 현상이었습니다. 지금은 약간 헷갈리기는 하지만, 수동식 타자기를 사용할 때는 한 줄의 끝부분에 이를 때마다 타자기 위에 붙은 레버를 오른쪽으로 밀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야 줄이 바뀌니까요.


그러나 전동 타자기는 한 줄의 끝부분에 글씨가 도착하면 자동으로 다음줄 첫 부분으로 타자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가지고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때는 그것마저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타자기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자동으로 다음줄 앞부분으로 가다니!


그래서 나의 타자기 시대에 관하여 말하자면, 바로 그때가 수동에서 전동으로 넘어가던 전환기였고, 나는 한동안 서로 다른 자판 모형으로 혼란을 겪어야 했다는 겁니다. 또한, 손에 익숙한 대로 타자를 하려다 보니, 한동안 책상 위에 두 대의 타자기가 놓여 있기도 했지요. 아직 두벌식이 익숙하지 않아서 공병우 타자기를 계속 사용하기도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 혼란기를 꽤 오래 거친 후에 나는 결국 공병우 타자기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어쩌면 타자기 전성시대가 저물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내가 전동식 타자기를 샀던 그때 말입니다. 타자기의 황금기가 저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산너머 저쪽에서 드디어 '퍼스널 컴퓨터'의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아득하게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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