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30 월 맑았다가 오후 늦게 흐림 (1)
(이 글은 1월 11일에 올렸지만 매거진을 선택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그 결과 시간 순서상 1월 28일에 올린 것처럼 보인다. 독자는 이 점을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1. 그새 많이 걸었다
바로 한 주일 전에 미포로 가서 송정까지 해변열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부터 해동용궁사로 걸어갔던 적이 있다. 그때 해변열차가 달리는 철로 바로 옆에 있는 나무 데크를 따라서 걷는 ‘욜로갈맷길’이 있었다. 그것은 부산광역시가 정한 욜로갈맷길 3코스이다. 오늘 나는 지난주에 열차를 타고 갔던 길을 거꾸로 걸어서 오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말해서, 송정역까지 먼저 가서 해운대까지 걷는 계획이다.
지난 15일 부산으로 온 후 나는 지금까지 많이 걸었지만, 굳이 갈맷길이나 욜로갈맷길이나 해파랑길만 따라 걷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걸은 코스를 돌아보면 욜로갈맷길의 60% 이상을 지나온 듯하다. 자동차 없이 하루하루 부산의 이곳저곳을 걷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됐다.
한국으로 와서 많이 걷게 된 것은 순전히 자동차를 타지 않는 덕분이다. 어떤 친구는 나에게 자동차를 렌트해서 다니면 더 여러 곳을 다닐 수 있다고 권하기도 했지만, 여러 곳을 많이 다니는 것이 내 여행의 목적은 아니다. 자동차 여행은 미국에서 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한국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걷는 것이 좋다.
미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매우 권장할 만하다. 한국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대단히 우수하다. 또한 여행자 입장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여행비용도 줄이고 천천히 다니면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건강에도 좋다. 그렇게 다니면서 주변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울이나 부산처럼 대중교통이 잘 발달된 곳에서 나 같은 여행자까지 굳이 자동차를 이용해서 다닐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과 버스 교통망은 충분히 잘 갖춰져 있다.
하여간, 요즘 부산에서 한창 부촌으로 떠오르는 기장 쪽으로 가지 않았으므로, 기장에서 송정역에 이르는 해안길인 1코스와 2코스를 가지는 않았다. 기장을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서면에서 멀기 때문이다. 또한 기장에 무엇이 유명한지, 그런 곳을 ‘뚜벅이’ 여행으로 갈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기장에 안 가본 것은 아니다. 4년 전에 지인들과 자동차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가 근사한 호텔에서 하룻밤 묵기도 했다. 호텔 뒤편 해안가에 있는 산책로와 연회장은 매우 아름답고 평안해 보이는 곳이었다. 그때의 경험만으로도 기장을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외에, 금정산성에서 낙동강 구포에 이르는 산행길인 10코스, 구덕산 꽃마을에서 승학산 당리재석골에 이르는 산행길인 8코스도 아직 가지 않은 길이다. 산길을 나 혼자 가는 것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걸은 길은 욜로갈맷길 코스를 초과해서 걸은 곳이 많았다.
예를 들면, 오륙도에서 송정역까지 해안길이 3코스에서 5코스까지 중간중간에 끊어져서 나누어져 있지만, 나는 그 전체 둘레길을 모두 걸었던 것이다. 영도에서도 섬 끝에 있는 태종대에서 시작하여 꼬불꼬불한 영도의 해안길을 지나서 영도대교를 거쳐 자갈치시장과 깡통시장까지 끊김이 없이 모두 걸었다.
이런 설명은 여행자들이 흔히 훗날 자랑스레 하는 말이지만, 나에게도 꽤 귀중한 기록이다.
2. 송정해수욕장과 해안 철로길
이렇게 걸을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서울에서부터 긴장한 채 지속된 여독을 풀 새가 없었으므로, 부산에 와서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운이 좋았다. 하필 날씨가 계속 좋았던 것도 크게 한몫했다.
오죽하면 온종일 비가 오기를 바랐을까.
비라도 와야 숙소에서 그 핑계로 푹 쉬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가 제대로 내린 날은 없었고 나는 결국 방 안에서 내내 쉬는 날도 없었다.
시월은 너무 맑기만 하다.
지하철을 타고 가서 송정역에서 내리면 비교적 한산한 거리로 나온다. 거기서 송정해수욕장까지는 20분만 걸으면 된다. 그곳으로 가는 보도에 행인은 거의 없었다. 한여름이라면 혹시 다를까. 하여간 주변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나는 내가 가는 길이 맞나 자꾸만 확인했다.
송정해수욕장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해변 도시인 부산에는 크고 작은 해수욕장이 여러 곳이지만, 그중에서도 송정은 무척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해변 길이가 1.2킬로미터 정도인 이곳은 요즘 ‘서핑 메카’로 유명하다. 모래사장에 서핑 도구들이 쌓여 있어서 이곳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만 해도 10월 말인데도 물이 여전히 차지 않아서 그런지, 바다로 들어가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 여럿 보였다. 파도는 매우 잔잔했다. 모래사장도 급하게 경사진 곳이 없는 듯 바닷물로 들어가서 멀리까지도 서핑복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그들은 파도가 오는 낌새를 보고 보드 위로 올라서기도 했는데, 파도가 너무 약해서 그런지 금세 물로 떨어지곤 했다. 저렇게 물에 들어가서 움직이다 보면 그리 춥지 않은가 보다.
부산에서 요즘 각광받는 핫 플레이스는 광안리해수욕장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해수욕장은 해운대이다. 진짜 부산 사람들이 찾아가는 해수욕장은 해운대나 광안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 곳은 관광객들과 외지인들이 자주 찾아가는 곳이다. ‘찐’ 부산인들이 가는 곳은 송정과 다대포이다. 어제 갔었던 송도해수욕장은 다른 곳에 비해 아담하고 지하철이 닿지 않는 곳이라 아무래도 사람들이 덜 찾게 될 듯하다.
다대포는 부산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모래도 가장 고운 곳이다. 현재 기억으로는, 지금까지 내 일생에서 본 낙조 풍경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하고 아름다웠던 세 곳 중 하나가 다대포일 것이다.
송정해수욕장에 이르기 바로 전에 작은 언덕에 죽도공원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면 아담한 정자도 있고 송정해수욕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나는 잠시 그곳에 들렀다가 모래사장에 들어갔는데, 여러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모래사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모래사장에 맨발로 들어섰다. 직접 밟아보니 모래가 매우 부드럽게 느껴졌다. 물은 그리 차갑지 않고 적당한 온도였다. 발 밑에 닿는 모래가 주는 부드러움은 해운대나 광안리나 송도 해수욕장보다 우수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가장 고운 모래는 다대포에 있다.)
파도에 실려오는 바닷물이 쓸고 가는 고운 모래를 밟으면서 걷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해변 서남쪽에 있는 구덕포 공원 언덕 위로 가을 오후의 해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햇살이 바닷물과 모래사장에 비쳐서 약간 눈이 부셨다. 구덕포 언덕 위에 태양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고, 파도가 들이닥친 모래사장에도 그 빛이 반사되어서 나는 마치 두 개의 태양을 보는 듯했다.
모래사장 거의 끝에 이르러 밖으로 나가기 전에, 나는 차도 있는 곳으로 가서 모래사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앉았다. 젖은 발을 말려야 다시 양말과 신발을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돌계단에 앉아서 나는 멍하니 고요한 전경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넓기만 할 듯한 바다와 하늘이 저 멀리 수평선에 맞닿아 있었다. 지나치게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어서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질 정도였다.
송정해수욕장에서 나와서 구덕포 공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안길을 걷다가, 이어서 블루라인 해안 철도가 있는 곳으로 갔다. 해변열차를 위한 철로가 있고 그 옆으로 나무데크 길이 길게 이어졌다. 점차 해가 기우는 푸른 바다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관이다.
해변 열차는 미포에서 송정까지 이어져 있는데, 승객들은 객실에서 바다를 보고 앉도록 만들어졌다. 그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 중 많은 사람이 나무데크 길을 걸었다. 나무데크는 인공적이지만 걷기에 편하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철길 옆을 걷는 재미가 있다.
청사포간이역에 이르렀을 때 그곳부터 미포역에 이르기까지 리모델링을 이유로 데크 길이 막혔다는 공지가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어떻게 해운대까지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역사 직원에게 물어보니까 나무데크를 조금 더 가다가 막힌 곳이 나오면 거기서 산을 우회하는 길로 가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나무데크 길을 계속 걸어갔다. 정말로 길 끝에 이르러 “길 없음’이라는 사인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길래 들어섰는데 그 길로는 산을 우회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올라와서 다른 길이 있나 찾아보았지만 다른 길이 눈에 띄지 않았고 아무도 그 이상으로 걷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뒤에서 나를 따라오던 여성 셋이 있길래 나는 그들에게 길이 막혔다고 말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온 관광객이었다. 할머니, 엄마, 딸, 이렇게 3대 세 여자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고 했다. 서울에 있다가 부산을 나흘간 여행 중인 그들은 자신들도 해운대에 갈 예정이라고 말했는데, 그들은 다시 열차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그들의 열차 티켓은 중간에 내렸다가 다시 탈 수 있는 티켓이었다.
청사포역에서 거리로 나선 나는 버스를 타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빈 택시가 보였다. 나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해운대에 가기 전에 있는 달맞이길로 갔다. 이번 여행에서 나 혼자서 택시를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택시를 탄 지 10분도 안 되어서 택시 운전사는 나를 산 위 도로변에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