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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단단 Dec 12. 2022

사랑의 밀착력

포토그래퍼 할 PHOTOGRAPHERHAL


‘사랑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랑이 고통처럼 느껴지는 건 사랑을 둘러싼 것들 때문이다.’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열림원, 2003, 69-70p)


사랑은 다채로운 감정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감정들은 일상에선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질감을 가지고 있죠. 삶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짙고, 강렬한 사랑의 경험은 어떤 이에겐 어마어마한 영감으로, 어떤 이에겐 전반적인 삶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어쩌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기도 하지만 하나하나의 경험들은 각각의 주체에겐 무엇보다 특별합니다. 모두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그 내용은 전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가장 가깝고 친밀하면서도 가끔은 신기루처럼 영영 붙잡히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 요번 시간엔 이 고귀한 감정에 대해 신선한 방식으로 접근한 작가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출처: www.myp-magazine.com


할PHOTOGRAPHER HAL은 일본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작가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 관계에 대한 사유를 독특하고 다소 충격적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들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기죠. 광고 사진으로 사진계에 처음 입문한 그는, 이후 꾸준히 경력을 쌓아가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였고 마침내 예술 사진의 영역으로까지 재능을 펼쳐가게 됩니다. 


출처: www.myp-magazine.com


할의 작품을 아우르는 하나의 주제는 바로 사랑입니다. 비록 흔하디 흔한 주제일지 모르지만, 작가는 이 흔한 개념을 보다 새롭고 다양한 각도에서 탐구하기 위해 이색적인 실험을 반복하죠. 그 시작은 바로 ‘진공 포장된 연인’을 촬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식품의 부패를 막기 위해 플라스틱 비닐 속 공기를 펌프로 전부 제거한 뒤 밀봉해 버리는 포장 방식을 인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한, 이례 없는 아이디어였죠. 시간이 흐를수록 변질의 위험에 노출되는 사랑, 뒤이어 찾아오는 권태로움과 영원한 이별은 사랑의 빠진 이들에게 도사린 가장 큰 공포였기에 작가는 아주 단순하고 심플한 방식으로 이에 대항합니다. 여러가지 상황과 변수에 휘말리기 이전, 오직 서로만이 전부였던 황홀한 순간을 그대로 진공 포장해 버림으로써 말입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관계의 변질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불안의 도피처로써, 또는 또 다른 시작의 원동력으로써... 작가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의 개념을 재현합니다.


출처: www.myp-magazine.com


밀착력. 작가는 사랑이라는 깊은 감정을 공백 없는 밀착에 비유합니다. 진공팩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밀착된 ‘연결’이라는 점을 강조하지요. 비록 타인으로 만났지만, 조그마한 이격이라도 허용할 수 없는, 너무나 완벽한 '닿음'을 갈망하는 우리의 욕망을 꾸준히 엿보기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별도의 안전 장치없이 진공 상태로 인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두 사람이 담긴 거대한 플라스틱 비닐 속 공기를 전부 빼내고 나면 연인은 마치 하나의 모습처럼 빈틈없이 뒤엉키게 되고, 마침내 둘 사이에 존재했던 물리적 거리는 전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산소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무사한 촬영을 위해 작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0초 뿐.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을 극도로 제한된 시간이었죠. 그는 최고의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촬영 과정 탓에 작가는 촬영 자체보다 모델을 구하는 일이 더 어려웠다고 고백합니다. 참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일날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촬영 직전에 크게 다투고 그 자리에서 헤어져버리는 인연도 있었다고 하네요. 물론 특별한 경험을 나누었다는 공통점 덕분에 사이가 더 돈독해진 케이스도 있었지만요.  


출처: www.myp-magazine.com


작품 자체는 좀 괴기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작가가 품고 있는 사랑에 대한 믿음은 견고하고 굳건합니다. 처음에 둘로 시작된 사랑은 곧 모이고 모여 집단이 되고, 마을에서 지역으로, 도시에서 국가로, 끝내 국경을 넘어서며 끊임없는 사랑의 고리들이 점점 늘어갈 거라 상상하죠. 그리고 궁극적으론 이로 인해 차별이 없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합니다. 실제로도 작가는 이후의 작품들에서, 둘만을 밀봉하였던 진공팩 안을 벗어나 가족과 친구들, 이웃들, 그리고 이들을 감싸고 있는 집과 공원, 배경들까지 전부 비닐 속에 넣어버립니다. 결국 눈 앞에 존재하는 풍경 전체를 진공 포장 해버리는 것이죠. 


출처: www.lensculture.com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은 결국 하나가 될 것이다.


마치 예언처럼 들리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의 형상, 그리고 어쩌면, 그 어떠한 것보다 원하고 원하던 감정의 결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럼 여기까지,

당신의 주단단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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