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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단단 Mar 04. 2024

불안을 환대하며 성장하기

헤르난 바스 Hernan Bas


어린 시절, 우리를 이불속에서 벌벌 떨게 했던 미지의 존재들을 기억하는가?

밤이 되면 사람의 피를 찾아 헤매는 뱀파이어, 호수 속 네스 호의 괴물, 외계인과 유에프오, 주술을 부리는 마녀와 그들을 따르는 후예들... 누구도 그 실체를 모른다는, 하지만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괴기스럽고 두려운 존재들의 이야기. 어엿한 어른이 되고 난 이후엔 소설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흥밋거리로 여유롭게 그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생각보다 끈질기다.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가끔 섬칫한 불안함 속으로 우릴 몰아넣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젠 이러한 도시전설의 존재들보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이 훨씬 공포스럽고 잔인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다행인 걸까.


  

Pink Plastic Lures, 2016 / 출처: scadmoa.org



2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루벨 컬렉션에서 개인전을 열며, 일찍부터 성공적인 커리어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미국의 화가 헤르난 바스. 그는 쿠바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의 영감의 원천은 자신의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독특한 취향들. 특히 그는 오컬트 적인 것들에 심취해 있었다. 뱀파이어와 유령, 귀신을 불러오는 주술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예사롭지 않은 취향의 기반엔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던 형과 누나의 영향이 컸다. 때문에 바스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며 여러 이야기들을 전해 듣게 되었던 것. 바스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와 관련된 책과 물품 등을 직접 수집하며 자신의 호기심을 채워갔다. (그의 수집품 목록 중엔 만화 고스트 버스터즈에 나오는 유령을 가두는 항아리도 있다고)


The Start of Something New, 2004 / 출처: phillips.com



바스는 여러 인터뷰에서 물질세계에선 설명되지 못할, 초자연적인 것에 매료되어 있는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꾸준히 언급한다. 자유로운 상상이 마치 사치인 양 취급받는 이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한 번쯤 동심으로 돌아가 맘껏 자신만의 공상을 펼쳐보라는 충고도 함께 덧붙이면서. 


사실 성공적인 삶과 경력을 갖기 위해선 독특하면서도 비주류적인 취향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다. 취향의 다양성에 대해 가르치거나 언급하는 것조차 불편해할 때도 있다. 이성과 이론을 벗어난 존재나 세계에 대한 것들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 것도 꺼리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예술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그저 유명 아티스트들의 영감의 방식이나 그 원천을 파악해 보라는 모호한 단서들만 무책임하게 던져줄 뿐이니까. 


하지만 이런 바스를 비롯해, 자신의 신념과 스타일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활동을 펼치는 중인 많은 아티스트들은 유별난 취향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어린 시절의 바스 역시도 혼자 도서관 구석에 앉아 몰래 외계인과 유령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친구에게 들켜 괴짜 취급을 받던 아이였지만, 그 꾸준한 호기심과 상상력은 그를 결국 세계를 놀라게 한 멋진 아티스트로 만들어 주었다. 결국 무엇을 좋아하는지 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살피며, 그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것이 아닐까? 



The GloFish Enthusiast, 2019 / 출처: lehmannmaupin.com



바스는 이처럼 자신의 취향을 당당히, 그리고 시대에 발맞춘 세련된 방식으로 화풍에 드러낸다. 그는 과거의 미술, 영화, 문학에서 인용한 이야기들을 재료로 하여 다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집중한다. 애드가 앨런 포와 메리 셸리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속 매혹적인 주인공들은 물론,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같은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작가는 이러한 과거 속 캐릭터들과 작품들 속의 등장하는 인물들을 넘치는 상상력으로 연결 짓는다. 




THE BASIN OF A VERY EVIL RIVER, OR WHERE TO VACATION NEXT, 2008




한 점의 회화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상은 무궁무진하다. 첫인상에 마주한 강력한 분위기에 단번에 압도되는 경우도 있고, 대상을 실감 날 정도로 섬세하게 재현해 내는 기술에 감탄할 때도 있으니까. 뿐만 아니다. 때로는 기발한 발상으로 해묵은 고정관념을 깨 버리기도, 어떤 개념에 대한 급격한 반전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헤르난 바스의 작품 감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 작품 속에 항시 존재하고 있는 내러티브다. 그림이라는 매체는 멈추어 있지만, 또한 그 그림과 함께 하는 어떤 텍스트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작품 속엔 항상 인과관계로 엮인 어떤 상황이나 사건들이 반드시 숨어있다. 사실 일반적인 관람객이 그것을 단번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지만, 조금의 배경 지식만 있다면 우리는 더욱 풍부한 감상의 가능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The Monster Hunter (or desperately seeking Nessie), 2020




바스의 작품 "The Monster Hunter (or desperately seeking Nessie), 2020”를 예로 들어보자. 한때 스코틀랜드 네스 호수에 정체 모를 괴물이 출몰한다는 괴소문이 영국 전역을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소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첨단 시설과 인력이 동원되었지만 결국 괴물에 대한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은 이를 시시한 도시전설로 치부해 버렸지만, 그중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사냥꾼 스티브 펠텀 Steve Feltham이 그 주인공. 


스티브는 약 24년이란 긴 시간 동안 네스 호에서 머물며 정처 없이 괴물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괴물의 실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는 어느새 네스 호의 괴물을 바라보는 데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기네스 보유자가 되어 있었다. 바스는 이러한 기사를 접한 뒤, 스티브의 몰입과 집념에 강한 영감을 받았고 후에 “The Monster Hunter"란 제목의 작품을 선보인다. 호수에 떠 있는 흔들리는 보트 안에서, 충혈된 눈을 한 채, 지친 듯 망원경을 내팽개쳐 둔 한 소년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바스는 이 그림에 대해 짧은 코멘트를 함께 남긴다. 


"사람들은 그를 (네스 호의 괴물을 찾는 사냥꾼 스티브 펠텀) 조롱하거나 불쌍히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것을 찾고자 하는 캐릭터의 흥미로운 상상과 호기심을 나는 좋아합니다."



Red Herring, 2004 / 출처: perrotin.com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스는 마치 모든 회화가 어떤 이야기 책 속에 숨겨진 삽화처럼 느껴진다 고백한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 안에서도, 어쩌면 이곳에 걸린 수많은 그림들이 다양한 이야기들의 삽화들을 모아 한데 전시해 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고. 


그의 이런 재미난 상상은 곧 내러티브를 품고 있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창작 방식과 맞닿아 있다. 그의 작품이 일러스트레이션과 순수예술 사이의 묘한 경계에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 역시 이러한 지점과 연관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캐릭터성을 부각한 등장인물들이 대거 출연한다. 그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 어떤 사건을 겪고 있는지, 혹은 그들이 어떤 실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을 나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마음껏 상상해 보는 것 역시 감상의 좋은 포인트 중 하나일 수 있겠다.




Floating in the Dead Sea with Ghost Ship Pirated by Hedi Slimane, 2003



바스의 작품은 소년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창백한 팔과 다리, 마른 몸, 투박한 햇살에 거칠게 그을린 피부와 나른한 몸짓. 마치 인생의 가장 질풍노도의 시기에 표류된 불안정한 그들의 모습을 가장 근사치로 표현한 듯 보인다. 그들에게선 으레 남성에게 교육되고 요구되어 오던, 전통적 남성성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억압을 필사적으로 걷어내고, 서툴거나 막연해 보이는 미성숙한 분위기를 더 극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그가 원하는 건 완결성이 짙고 웅장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휘황찬란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이란 긴 모험의 여정 속에서 방황하며 흔들리는 평범한 소년들의 모습에 가깝다. 



The ghost hunter (with trigger objects) / 출처: dreamideamachine.com




이런 청춘의 불확실성은 곧 무한한 가능성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라 망설이는 소년의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선택의 부재는 곧 선택의 가능성으로써 뒤이어 이어질 소년의 삶의 풍경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선택의 인과로 얽혀있는 인생의 한 지점, 그리고 이러한 지점 속에 머무는 소년의 역사 중 한 부분을 포착해 강렬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숲과 바다. 예측 불가능한 자연 속에 머물러 있는 소년들은 그 불안한 결을 함께하면서도 한편으론 내면에 잠재된 힘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작가의 초창기 작업을 살펴보면, 인물들이 풍경에 숨어있거나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진 반면에, 최근 작품 속에선 캔버스의 중심에 당당히 서 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서서히 이를 확립해 가는 성장 서사를 닮아 있다. 



two bathers by a river, 2017 / 출처: ocula.com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들은 나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2021년, 한국에서 열렸던 헤르난 바스의 개인전 제목은 <모험, 나의 선택>이었다. 비록 삶은 한 치 앞을 예감할 수 없는 '모험'과 같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만의 ‘선택’을 무기로 하여 그 모험을 기꺼이 감행한다. 바스의 작품들은 곧 작가 스스로의 삶 자체를 반영하는 은유의 확장이다. 그의 모든 추억, 그리고 그 추억을 건설해 왔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제 그의 붓 끝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소년들의 여정이,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들의 여정이, 부디 무사히 마무리되길 바라며.




필자: 주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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