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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Jan 11. 2024

토요일 오전 9시

그가 반숙 계란을 삶아낼 때

주말 부부 2년 차다.

요즘 온 가족이 함께 있는 시끌벅적한 토요일 아침은 경북 경산이라는 대구와 경계지점에서 맞이한다.

경계라는 단어를 쓰고 보니 부부 사이에도 어떤 적절한 경계, 다른 말로 선이라고 할까?

그 선은 매우 탄력적이어서 느슨하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하고 눈치껏 침범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대 침범하지 않아야 하는 어떤 영역을 표현하기도 한다. 경계를 지키는 데는 공감과 배려가 필요할 때도 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부부 간의 경계는 살아 생동하는 선을 만들고, 그것이 부부의 삶이 되고 스토리가 된다. 


토요일 오전 9시 인로씨의 마음은 가장 풍요로운 시간이다. 

일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퇴근 시간까지 홀로 팍팍한 서울의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적적함에 공허감도 찾아온단다. 때로는 허벅지 근력만큼이나 튼튼했던 마음 근육이 풀려서 사는 의미가 사그러드는 경험도 한단다.


이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부터 깨끗하게 정리하는 모범생이다. 일어나자마자 창문 열고 청소기부터 들고 집안의 먼지를 훑어내고 신선한 공기로 바꾸고 있는 나의 행동에 그는 적절한 템포로 아내의 행동에 어울릴만한 행동을 선택하는 듯 보인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경써서 행동하지 않아도 될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이력이 붙은 것일 뿐 의지적인 노력으로 에너지를 쓰는 행동들은 아니다. 


그 사이 인로씨는 아빠를 유독 좋아하는 막내 아들과 간단한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남편의 다음 행동은 나의 행동에 따라 달라진다.

사십대 중반에 다다르며 나의 컨디션을 나도 예측할 수 없다. 일하느라 굳어진 승모근 때문인지 두통을 달고 살고 전날 저녁 식사를 맛나게 하고서도 조금만 과식을 하면 새벽 내내 복통을 앓을 때도 있고 아이셋 출산을 했으니 이제쯤 사라질만도 한 생리통은 한 달에 이틀은 진통제를 먹고 잠시 쓰러져 있어야 할 정도로 버겁게 한다. 이런 몇 안되는 경우의 수지만 예측불가한 상황에서 돌아가며 찾아오니 아내의 컨디션을 살피는 것은 인로씨에게는 필수 고려사항이다. 서로의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살피는 것은 부부 사이의 묘한 선과 경계를 지켜내는 인로씨와 나와의 생활방식이다.


시나리오 1.


"아침을 뭘로 먹을까?"

가뿐한 컨디션에 한마디 말을 뱉고 나면 머릿속에는 먹을거리들이 순식간에 스캔되고 아이들보다 남편에게 좋은 아침식사가 무엇일지 결정한다. 그래봐야 간단한 아침식사다. 혼자 평일을 보낸 남편에게 해주고 싶었던 음식은 때마다 다르지만 가장 쉬운 아침은 데친 두부와 간장소스, 양배추찜이나 간장식초로 간단하게 버무려낸 샐러드, 과일 한 두가지.

아침식사는 간밤의 허기를 살짝 가셔주는 정도일 뿐 한 상을 제대로 차려서 먹지 않는다. 어차리 12시가 되면 거하게 한 상을 차려 푸짐한 점심을 먹게 될테니까. 더군다나 당뇨수치가 최근 나빠진 인로씨는 곡류나 과일류의 탄수화물을 절제하고 단백질과 채소식을 더 좋아한다. 


시나리오 2.


무거운 몸에도 나는 온 집안을 청소기로 훑어내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늘은 아침부터 두통이...."

"밤새 잠을 잘 못 잤어요. 이러다 어지럼증 오겠다."

이런 류의 말들을 내뱉으면 남편은 슬그머니 냉장고로 가서 계란을 꺼낸다.

그러면 과일 한 가지와 반숙란 두 알이 오늘 아침식사가 된다.


인로씨가 만들어낸 반숙란을 먹을 때면 늘 아이들도 나도 감탄을 자아낸다.

감동란과 흡사하나 따뜻한 반숙란을 거의 실수 없이 만들어 낸다. 

인로씨가 삶아준 따뜻한 계란을 한 입 베어 물면

"음~ 역시 아빠의 솜씨는 최고!"라며 순발력 좋은 막내의 칭찬이 제일 먼저 쏟아진다.


요즘은 겨울이라 끓이는 물도 차져서 삶는 시간도 1분 더 길어졌다며 자신만의 계란 삶는 매뉴얼을 읊는다.

"8개를 삶으면 계란이 모두 잠길랑 말랑하게 물을 붓고

전기레인지에 13분으로 설정해 놓으면 돼.

13분 알람 소리가 울리면 딴 짓을 하다가 계란을 보면 

좀 더 익혀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절대 그 생각에 속으면 안 된단다. 

그냥 무조건 찬물행이란다."


투박한 그릇에 계란을 모두 담아서 껍질을 버릴 그릇까지 챙겨서 식탁 위에 올린다. 가끔은 계란이 잘 안까지는 불상사가  있기도 하지만 우리집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도 멀쩡하게 깔 수 있는 '엄지권법'을 구사하며 아빠의 삶은 계란에 늘 만족해 한다.


남편의 건강을 고려하여 아내가 차린 간단한 아침식사와 인로씨가 차려낸 반숙 계란 두 알.

우리 가족에게는 모두 괜찮은 아침 식사 메뉴다. 그러나 어떤 아침 식사를 하게 되는가는 인로씨와 나와의 적잖은 상호작용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이 우리 가족들에게는 익숙한 생활 방식이 되었다.


나의 영역만 지키겠다고 날을 세우다가는 끼어들 틈 없어 서운해진 상대는 처음에는 상처 받다가도 나중에는 복수하듯 상대를 오히려 버려두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나의 영역도 정막해질 수 있다. 나의 영역이 차갑고 정막해진 후에야 상대에게 손짓을 해도 그 손짓에 응한 사람은 없다. 부부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늘 침범해도 좋을법한 물렁한 영역표시도 좋지 않다. 사람이 늘 같은 수준의 에너지로 타자를 환대만 하며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깜냥을 모른채 지나치게 자기 영역을 내어주고만 살게 되면 에너지가 고갈되는 번아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적절한 경계로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며 경계를 생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존중이다. 


인로씨의 반숙 계란은 나에게는 존중이다. 그의 선택에는 나에 대한 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경계를 지켜주고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지도 않는 적절한 선택. 부부 간의 존중은 그렇게 신뢰를 쌓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토요일 아침 9시 인로씨가 반숙 계란을 만들면 난조의 신체 컨디션은 그의 존중으로 생기를 찾아갈 여유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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