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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Jan 13. 2024

시험을 대하는 그의 자세

힘 빼고 적당히

직장 생활 18년 차. 중견 기업의 부장. 

연봉을 많이 줘도 새벽에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하는 동종 업종 대기업은 데려가 주시겠다고 해도 안가겠다는 남자.


인로씨는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도로 설계, 그 중에서도 자신은 해외 사업의 전문가가 되겠다고 열심히 커리어를 쌓더니 최근 6년 정도는 공항 활주로 설계가 주된 업무다. 내가 남편이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비교적 잘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남자는 자기 업무가 바뀌면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 준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자기 동료들은 어떤 일에 전문가인지도 친절하게 그리고 소상히 설명한다. 


10년 넘게 해외 도로설계를 하다가 공항 관련 업무를 하더니 식구들을 모두 이끌고 비행기 이륙을 가장 멋지게 관찰할 수 있는 인천의 어느 스팟으로 데려가 이런 저런 설명을 상세히 해준 적도 있다. 아이들이야 "우와~" "그래요?" 호기심 천국으로 호응하지만, 나는 속으로 좋은 여행지가 얼마나 많은데 여기까지 와서 이걸 보나 싶었다. 하지만 아빠가 자녀들에게 아빠의 직업을 자세히 알려주겠다는데 그 시도를 굳이 꺾을 필요는 없는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시험이 제일 싫다. 시험은 피곤하다. 실력을 확인하는 시험의 순기능을 제아무리 설명해도 내게는 먹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시험이든 나는 일단 100점을 목표로 설정하는 타입이다. 목표가 100점이라고 모든 시험을 100점 받으며 살진 않았다. 어찌됐건 결과는 시험을 매우 싫어하게 됐다. 그래도 늘 나는 내 앞에 주어진 문제들을 이왕이면 오답없이 풀고 싶다. 먹잇감을 보면 달려들고 싶은 동물의 세계에 있을 법한 본능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의 남편 인로씨는 그런 나를 참 별난 사람으로 바라보는 듯 하다. 아니, 그건 그의 표정을 본 나만의 해석일 뿐, 그는 자기 아내를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랑은 다르네.' 정도로 가볍게 넘긴다. 뭐든지 이렇게 쉽고 가볍다. 시험을 대하는 그의 자세도 내 눈에는 참 가벼워 보인다. 


"시험은 보통 과락 40점, 평균 60점이에요. 합격할 만큼만 공부해서 자격만 통과하면 돼요."

과락을 피해서 평균 60점을 맞으면 된다는 이 남자의 시험을 대하는 태도가 삶의 방식에서도 긴장감 없이 느슨해 보여서 잘 이해되지 않았던 적도 있다.


결혼 첫 해, 직장 생활 2-3년 차에 남편은 해외업무 전문가를 꿈꾸며 미국 기술사를 준비한다며 그 시작으로 FE 시험을 준비했다. 남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에서 공학분야에서 '기사-기술사'가 있다면, FE는 기사 시험 정도라고 했다. 무릎 높이 정도로 관련 원서들을 쌓아 두고는 공부를 시작했다. 내 눈에는 대충 적당히 하는 걸로 보였고 그래도 스터디그룹을 만들어서 꾸준히 모임을 이끌어 갔다.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게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혼자 진득히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진짜 공부지, 여럿 모여 앉아서 무슨 공부가 될까 싶었다. 스터디그룹의 멤버가 좋았나?  스터디를 하고 오면 배워 온 게 대부분이고 자기가 설명해 준 건 적었던 것 같다. 비교적 쉽게 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때도 이 남자의 태도는 일관되게 "맞출 수 있는 것만 맞추면 된다."였다. 


몇 해가 지나서 이번에는 한국의 기술사 수준의 시험인 PE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원서를 다리길이 만큼 쌓아 올릴 분량의 책을 갖고 와서 공부를 해보겠단다. 그러시라고 했다. 당시 나도 박사과정 막바지에 밤샘 공부를 하던 터라 남편의 공부 시간을 방해할 여유조차 없었던 터였다. 


시험 응시료만 수백불인데, 처음 시험은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전을 체감하는 차원에서 시험을 보고 오겠노라며 당당히 고사장으로 향했다. 물론 돌아와서는 합격은 기대도 하지 않았고 '느낌을 느꼈으니 됐다'며 팍팍한 살림에 수십만원을 과감히 날리셨다. 다행히 실전의 필을 그대로 이어서 수 개월을 정말 여념없이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것 같았다. 시험이 가까워 온 두어 달은 우리 집 거실 조명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올빼미형인 나는 밤을 세워 논문을 썼고 아침형인 남편은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했다.


PE 시험이 가까워 오자 인로씨는 자신감이 고양되는 듯 했다. 합격의 희망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강하게 어필했다. 그리고 역시나 당당하게 시험을 보러갔다. 다녀와서도 '될 것 같다'며 좋아했다. 발표가 임박해 오자 약간은 불안했던 지 '왠만하면 될 것 같다'고 했지만 표정에는 미소가 섞여 있는 것이 기대감이 커보였다.


시험 합격자 발푯날. 결과는 불합격. 

남편은 실의에 빠졌다. 마음이 아무리 상하고 좌절감을 느껴도 '삼겹살 구워 먹고, 한 숨 푹~ 자고 나면 언짢았던 마음은 모두 깨끗하게 풀린다'던 쿨한 인로씨가 아니었다. 이 남자의 이름 석자를 알게 된 이후부터 현재 시점까지 그가 가장 낙심했던 날이었다. 연년생 아이들이 서너살 되었을 때인데, 평소 같으면 아이들을 함께 돌봐줄만도 한데 쉬고 싶다며 혼자 안방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고 깊은 잠을 청했다. 그러고도 족히 일주일은 남편의 낙심을 위로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준비해 보겠다고 했다.


다행히 다음 시험에서는 넉넉히, 그리고 확실하게 PE 시험을 합격하며 절망을 승리로 돌려 놓았다. PE 시험은 인로씨의 인생 시험에서 적당히 해서는 안되는 하나의 관문이었을 것 같다. 용케 넘어섰으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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