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파트 불빛은 별보다 영롱하게 반짝인다.
80년 2월에 진주에서 태어난 인로씨
79년 11월 대구에서 태어난 나
다른 곳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이 스물 아홉, 서른이 되어 만났다.
말은 나면 제주로, 사람은 나면 서울이라는 옛말이 우리 두 사람에게 가슴에는 왜 그렇게 생생하게 박혔던 걸까? 지방에서 살던 우리 둘은 결국 수도 서울, 현란한 빛의 도시 서울에서 만났다.
요즘은 서울 강남의 집값이 지방 대도시와도 격을 달리하는 수준이 되다보니 감히 서울로 향했다가는 자칫 절망하고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야 하는 넘사벽의 도시가 된 듯도 하다. 그러나 20여년 전이나 요즘이나 서울은 지방 출신의 젊은이들에게는 한 번쯤 두주먹 불끈 쥐고 도전해 보고 싶은 열망의 도시임은 분명하다.
나와 인로씨가 처음 만난 곳은 서울의 대학로였다. 젊음의 활기로 가득 찬 곳, 창작 연극과 뮤지컬이 늘 공연되는 열정의 도시 한 복판에서 짝을 찾아 헤매던 우리 두 사람이 '옳거니!' 제대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 우리들이 각자 살던 곳은 서울 중심가와 뒤편 허름한 주택가였다. 인로씨는 영등포 신길동 옛날식 빨간 벽돌로 된 투룸짜리 2층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북아현동 가구골목 뒤로 촘촘히 자리 잡은 다세대 주택의 방 두 칸짜리에 살고 있었다. 우리 둘다 고향집은 번듯한 아파트였으나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우리에게 아파트가 우리의 거처가 되는 기적 같은 것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 꿈은 안중에도 없이 살았다. 그래도 낡고 허름한 주택이지만 지하방이 아니라는 것, 단 칸 방에 두세 명이 몸을 부대끼며 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각자의 생활공간에 만족하며 살지 않았나 싶다. 한 번도 서로의 거처에 대해 이렇다 할만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젊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도 두려움 없이, 거침없는 서울 생활에 몰두하고 있었다.
인로씨는 마치 성지순례를 하듯, 자신의 삶의 궤적을 데이트 코스로 설정하며 연인이었던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두 곳이 있다.
첫 번째 장소는 신촌 주변에서 대학을 다니던 형님과 하숙하던 바로 그 집의 그 방이다. 나에게 소개해 줄 때는 취준생이었던 형이 혼자 살고 있었는데, 원래는 1인실인 방을 덩치도 크지만 다행히 우애도 좋은 두 형제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방의 크기를 보아하니 자면서도 호흡을 맞춰 몸을 움직여야 할 것만큼 좁은 방이었다. 주거비를 아낄 수만 있다면 생존은 문제가 없었던 두 형제가 살던 방이니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 형과 몸을 부비며 살아보지 않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나 역시 지방 출신의 유학생이었기에 그 정도의 지질함은 그의 '과거'일 뿐 '현재'는 아니었으니 천만다행이다. 만약, 그 방의 지질함이 인로씨의 현실과 맞닿아 보였다면 우리의 연애는 그즈음에서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두 번째 장소는 현재 살고 있는 2층짜리 투룸으로 이사오기 전에 친한 동생과 함께 살았다던 지근의 지하방이다. 비어있던 캄캄한 방에 들어간 순간 케케한 곰팡이 냄새에 창문 하나 없었다. 두 사람이 24시간을 머물며 호흡하기에는 산소가 부족해서 질식할 것만 같은 방이었다. 슈퍼집주인이 소유한 그 방은 두 사람이 나간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을 들이지 않고 창고로 쓰기로 했다고 한다. 그 방을 보니 인로씨가 다시 보였다.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서울에만 존재하는 험지의 정글이나 동굴 어딘가를 탐방한 듯 현기증이 났다. 사랑에 눈이 멀었던 걸까? 나는 인로씨가 강인해 보였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위대한 생존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아직도 왜 그는 내게 자신이 몸 담았던 공간을 데이트 장소로 삼아 탐방하듯 보여주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놀란 가슴을 혼자 쓸어내리며 꽁무니 빼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1년 간의 연애 기간을 보내고 결혼 준비에 들어갔다. 결혼 준비의 가장 큰 부담은 '살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부동산재테크가 2-30대까지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다. 수천만원에서 억단위를 넘나드는 부동산 재테크는 강남 아줌마들의 영역이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인로씨는 5천만 원을 갖고 있었고, 나는 3년 직장생활 동안 2천만 원을 모아두고 있었다. 우리가 살 집을 마련하는 데 책정된 예산은 자연스레 총 7천만 원이었다.
먼저 나의 직장과 가까웠던 왕십리쪽을 둘러봤다. 아파트 전셋값이 폭등하고 있던 때라 서울 아파트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예산에 맞춰 왕십리 다세대 주택을 알아봐도 시장통 낡은 주택이 고작이었지만 어두컴컴한 주변환경을 생각하니 도저히 살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경기도로 좀 나가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지하철 노선표를 펴 들고 구리, 남양주까지 전철을 따라 훑어나갔다. 그곳에도 우리를 환영해 주는 곳은 없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직장 생활을 하며 한 푼 두 푼 모아서 결혼을 결정한 예비 신혼부부는 데이트 삼아 집을 보러 다닌다지만 현실을 어둡고 냉정했다.
한 번은 경춘선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서울을 빠져나가 경기도를 지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아파트들이 있었고, 또 새롭게 지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 어디에도 우리가 들어가 불을 밝힐 집은 없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인로씨는 가끔 요술을 부리는 것 같다.
부동산을 통해서는 어디에서도 마땅한 집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날 같은 회사에 다니는 대리급의 선배가 곧 청약받아 놓은 아파트로 입주하게 되면서 자신이 살던 집을 내놓게 될 예정이라고 했단다. 용산구에 있으니 서울의 중심에 있어서 직장생활에 그리 불편하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선배가 신혼살림을 2년 동안 살았던 경험에 따르면 꽤 괜찮은 집이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또 데이트 삼아 그 집을 한 번 보러 가자는 것이다.
다행히 신혼살림이라 그런지 집은 깨끗해 보였다. 다세대 주택이지만 우리 두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빨간 벽돌집은 아니었으니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집이라 상태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현재 전세가는 5천만 원이라고 하니 세상물정 모르는 우리 두 사람은 가격도 좋다며 집주인의 마음과 상관없이 방 두 칸에 약간의 거실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공간까지 있는 아담한 신혼집을 꿈꾸며 기분 좋게 그 집을 나왔다.
그 당시 서울의 모든 전세가가 오르고 있던 터라 결국 우리는 그 집을 전세 6500만 원에 계약을 하고 신혼살림을 들이기 시작했다. 서울의 아파트, 아니 경기도의 아파트조차 스물아홉, 서른의 서울 생활 10년인 우리들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깜깜한 밤에 전철을 타고 한강을 지나면 안다. 서울에는 정말 많은 아파트들이 그 아름다운 한강을 따라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전철에 몸을 실은 젊은 청년 두 사람은 실망스럽게도 내 집은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그래도 젊음은 우리 두 사람에게 냉정과 치열함을 선물했다. 어금니 꽉 깨물고 저 많은 불빛 중에 반드시 내 것을 하나 가져보리라는 결심은 눈을 마주하고 말하지 않아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현실은 냉정해도 인로씨와 나는 생기 가득한 청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