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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Jan 15. 2024

8호선 장자호수공원역이 거기에 생긴 이유를 저는 압니다

소원 들어주는 남자

후암동에서의 생활도 신혼부부에게는 괜찮은 선택지였다. 주말이 되면 뒷길을 따라 올라가면 남산타워까지 산책을 했고, 결혼 후 처음으로 맞이했던 새해 일출을 본 것도 남산이었다. 골목이 조금 어두웠지만 후미진 곳이 아니어서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고, 시내버스가 한대 밖에 되지 않았지만 종점인지라 앉아서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여유만 있으면 운동삼아 숙대입구역까지 걸어 다니면 전철도 이용할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다세대 주택가에서 불편한 점은 분리수거가 어렵고 종량제 봉투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면 길고양이들이 와서 봉지를 헤집어 놓아서 날씨가 좀 따뜻해지면 음식물쓰레기 관리가 잘 되기 어렵다. 골목길 초입에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라고 써 붙여놓고 CCTV를 달아놓아도 해결되지 않는 악취와 지저분함은 늘 있었다. 그러니 역시나 이런 문제를 삶에서 해결하는 방법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하듯, 마음의 안식처에 대한 소망은 언제나 아파트가 답이었다. 


신혼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는 자가용이 없었던 지라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만 찾아다녔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래서 가는 곳마다 비싸다는 생각에 한숨만 푹푹 나왔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구리에 전철이 다니지 않지만 살기는 좋은 동네를 알게 되었다. 주말에 그곳으로 데이트 삼아 동네 구경을 하러 갔다. 장자호수공원이 있었고 호수 가까이에는 비교적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있었고 길 건너에는 오래된 아파트에 복도식 아파트들도 눈에 띄었다. 저기라도 어떨까? 이 동네의 평온함을 누릴 수 있다면야!


장자호수공원을 산책하면서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우와~ 이런 데서 살면 너무 좋겠다." 집 앞에 이런 호수 공원이 있으니 저녁마다 산책하면서 자연을 즐기면 얼마나 행복할지 즐거운 상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은 그저 감탄의 언어들이었을 뿐 이곳에 살게 해 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당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인 인로씨는 아내의 감탄사를 흘려듣지 않았다. 꼭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 새겨져 버린 것이다. 장자호수공원의 데이트는 잊고 지나갈만 했는데, 인로씨는 휴가를 내서 혼자 구리역에서부터 장자 호수공원까지 여러 길을 따라 걸으며 지방 출신에게는 낯선 '경기도 구리'를 답사하기도 했다. 나에게도 자신이 걸어 본 길 중에 걷기에 괜찮은 지름길을 소개하며 주말에 다시 구리를 가보자고 했다. 


무슨 생각인지 부동산중개소도 들어가서 10평대부터 20평대까지 복도식 아파트들을 직접 둘러보며 마치 중개소 사장님들께는 신혼집을 새로 구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아내인 나에게는 그저 가벼운 경험이라며 집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집은 어둡고 칙칙해서 싫고, 또 어떤 집은 지저분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러 집들을 둘러보니 정말 살고 싶은 집도 있었다. 그리고 부동산중개소 사장님께서는 이 지역에 전철이 들어선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장소가 어딜지는 모르나 하여튼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며 부동산에 대해 철부지인 우리들을 꼬드기기도 했다. 


인로씨는 진지했나 보다. 구리가 경기도의 아주 작은 지역인 데다 그는 이미 발품을 팔아 구리를 샅샅이 걸어볼 상황인지라 사장님의 이야기도 남다르게 들렸던 듯하다. 부동산중개소를 빠져나온 우리 두 사람은 그저 대화의 소재 삼아 새로 생길 전철역은 여기다, 저기다 어쭙잖은 예측에 논리를 세워가며 색다른 데이트로 하루를 보냈다. 살아보고 싶은 집을 만나기도 했지만 감히 탐을 낼 수 없는 처지였으니 나는 씁쓸해했고, 남편은 궁색한 방법들을 찾아볼 심산이 보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돈에 욕심을 내서 무리를 하면 안 된다며 남편을 달랬고, 남편은 아내의 말에 수긍하며 마음을 접는 듯 보였다. 


며칠이 지나 인로씨가 오늘은 퇴근 후에 청계천에서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가자고 청해왔다. 나는 퇴근 후에 남편을 만나서 노닥이는 것이 신혼생활의 전부이니 걷기 좋은 청계천을 마다할 리 없었다. 인로씨는 좀 걷다가 구리의 아파트를 돌며 둘 다 마음에 들었던 아파트를 구매하기 위한 자금 계획을 꼼꼼하게 세워왔다. 계획의 핵심은 은행 대출을 최대한 받고도 모자라는 2천만 원을 누구에게 빌려서 어떻게 갚는가에 대한 보잘것없는 계획이었다. 거기가 3천만 원까지는 대출을 받는 게 무섭지 않았는데 1억이 넘는 돈을 빚진다는 것은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출이 뭔지도 모르던 남자가 이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갖고 와서 집을 사자고 하니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부부이고 남편에게 터무니없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니 내키지 않지만 생각해 보겠노라 이야기를 했다.


정말 생각만 해보려고 했는데, 며칠이 지나 우리는 매도인 부부와 우리가 마음에 쏙 들었던 바로 그 아파트의 거실에 앉아있었다. 엘지원앙아파트 23평형의 복도식 아파트. 구리 전체에서 가장 싸게 나온 집이었다. 그리고 인로씨는 자신의 자금계획이 정직하게 적힌 엑셀시트를 인쇄해 와서는 당당하게 500만 원 깎아 달라고 요청했다. 계약 관계에서 무슨 진심을 전하겠다는 것인지 그는 어쨌든 정중하고 진지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했다. 이 남자의 진지함 때문이었는지, 매도인 부부는 정중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며 100만 원은 깎아줄 수 있다는 마지막 제안을 했다. 매물로 나와 있는 가격으로도 이 집은 구리 내 아파트 최저가였고, 길 하나만 건너면 호수 공원이 펼쳐지는 탄성이 나오게 했던, 바로 그 살고 싶은 동네에 있었다. 그러니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계약을 하기로 결정하고 1억이 넘는 빚을 떠안고 힘차게 살아보기로 결단을 했다.


인로씨와 16년을 함께 살아보니 좋은 물건을 가지는 것에는 별로 욕구가 없는 사람이다. 지금도 비상시를 위해 만들어 놓은 마이너스 통장에 실제로 마이너스가 박히면 가슴에 조임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신혼 초에 1억 이상의 빚을 지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용기였다. 이 동네가 너무 좋다며 탄성을 지르는 아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고 싶었던 서른 청년은 위험천만한 용감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몇 년 후, 인로씨가 '도로설계전문가의 견지에서' 예상했던 바로 그 장소에 8호선 전철역이 개통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샀던 아파트 1분 거리에 있어서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물론 집값도 올랐다. 1억이 넘는 빚은 세월이 가니 갚아본 적 없이 자동탕감 되어있었다.


8호선 장자호수공원역이 바로 그곳에 개통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누군가 묻는다면 이유는 한 가지다. 

'나의 남편 백인로 씨가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기도한 덕에 마침 전철역도 바로 그곳에 생기게 된 것!' 

좀 억측인가? 그래도 좋다. 어쨌든 8호선 장자호수공원역 가까이 있는 엘지원앙아파트는 꿈에도 그리던 우리 부부의 첫 아파트였다. 8호선 장자호수공원역이 올해 6월이면 개통예정이라고 한다. 개통이 되면 한 번은 가봐야겠다. 가서 나의 남편 인로씨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추억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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