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로 언발을 녹여주며, 중꺾마를 외치다!
결혼하고 나는 얼마 되지 않아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스무 살에 짜놓은 인생 시간표에 따르면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것은 스물여덟이었는데 3년 정도 늦어졌다. 남편은 학부 졸업 후에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에 매우 흡족해하는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에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좋았던 남자다. 그 시절에 대한 소재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검도 동아리며 대회에 나갔던 이야기는 모든 주제들을 삼켜 버리는 귀착점이었다.
그런 그에게 연애 시절부터 '언젠가는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싶다'라고 말해 왔었고, 인로씨는 교육만큼 좋은 인생 투자가 없다며 자기도 '박사 아내를 둔 남편'이 되면 나중에 라면집을 차려도 '박사 라면집'이고 간판을 걸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서른 초반 결혼하고 출산의 여정을 거치면서 박사학위를 받는 일은 그리 순탄치 않다. 박사 입학 동기 중에도 결국은 '아직까지 공부 중이냐?'는 남편의 가벼운 핀잔들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경우가 있었다. 가정과 자아성취라는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줘야 가능한 일이다. 당장에 성과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여성의 강인한 의지를 입증하려면 자녀 한 둘을 낳고 키우며 육아스트레스와 학업스트레스가 함께 닥치면 그 고통은 심각하다. 그러니 똑똑한 동료 기혼 여성이 낙오되는 것은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지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박사학위과정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전체 과업 중 아주 미미한 부분이고, 스트레스는 학위논문을 쓰는 일에서 극한에 치닿는다. 더군다나 박사과정 중에 나는 연년생으로 두 아이를 낳았고, 남편의 해외파견근무로 2년 이상을 베트남에서 살며 경력 단절 여성으로 살기도 했다. 그러니 한국에 돌아와서 학업을 다시 시작할 때는 경력단절여성으로 살던가,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임용의 경쟁에 뛰어들던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결단을 해야 했다. 어떤 일도 쉽지 않았지만 나의 선택은 후자였다.
남편은 직장인, 연년생 아이 둘, 그리고 나의 학업.
돌이켜 보면 극단적인 삶을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이었다. 특히,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1년여의 시간. 총 3년의 여정은 오로지 목표만을 위해 과몰입하며 살았던 잊지 못할 시즌이다.
이때, 나의 남편 백인로 씨는 무엇을 했나? 평가하자면 남편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다. 아이들이 잠든 깜깜한 밤에 우리는 집을 나와 산책을 했다.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펼쳐 놓으며 그날의 회포를 풀어냈다.
'사회복지사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함께 하는 동료와 어떤 점에서 관점이 맞지 않아서 연구가 답보상태에 빠진 이야기'
'박사학위 심사를 받을 때마다 교수님들의 서로 다른 의견을 어떻게 내 논문에 반영할지 고민된다는 이야기'
'한국에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근로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이야기'
등등
연구에 과몰입되어 있던 나는 자나 깨나 연구 생각이었고 밤낮 가리지 않고 논문을 쓰며 치열한 경쟁에 몸을 던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어떤 상황, 어떤 주제가 나와도 경청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늘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러니까, 그 상황은 검도로 치면~"이라며 자신이 잘 아는 소재에 빗대어 반응해 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언어가 웃겨서 피씩 웃지만 그의 진지한 설명을 듣다 보면 정말 검도는 나의 고민가 밀접하게 맞닿아있었다.
남편은 일반적인 사회현상에는 매우 둔감한 공대 출신에 과업 중 문제를 풀 때는 수백 년 전 학자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가장 안전한 방법을 적용해서 해법을 찾고, 그저 검도를 사랑하는 남자. 아내인 나는 사회현상의 변화에 기민하고 말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회과학 연구자. 두 사람이 한밤 중에 무슨 대화를 그렇게 현란하게 했던지, 지나고 보면 새로운 주제는 모두 내가 꺼내고 남편의 검도가 그 모든 이야기를 흡입하고 웃으며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던 듯하다.
늦은 밤 산책이 끝나면 자정에 이르더라도 나는 야밤연구를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적막한 밤에 홀로 불을 켜서 집중할 때 나오는 괴력은 매우 컸다. 연구가 끝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새벽 서너 시를 넘는 일은 다반사였다. 수년 동안 그 생활을 하면서도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남편과의 일상이 있다.
추운 겨울에는 야밤연구에 몰입을 할 때는 손발이 얼마나 시린지 모른다. 연구 중에는 몰랐다가 피곤해서 막상 침상에 들면 그제야 손발이 차서 쉽게 깊은 잠에 들기가 어렵다. 바로 그때, 사람 체온만큼 내 몸의 냉기를 빨리 가셔주는 것도 없다. 어쩌다 남편의 다리 사이에 발을 끼웠는데 발이 녹으며 나도 모르게 꿀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남편에게 간밤에 내가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의 몸에 찬 발을 녹이며 단잠을 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날 밤에도 새벽까지 논문을 쓰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은 분명 기억도 못할 거면서 "수고했어요." 잠결결에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잠옷으로 감싸고 있던 자기 다리의 속살을 내어주며 찬 발을 녹이며 자라고 한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깊은 잠에 순식간에 빠져드는 이 남자와 달리 나는 잠드는 것도 유별나고 나의 질 좋은 수면을 방해하는 사람에게는 잠결에도 최대의 짜증으로 응수한다. 그런 나로서는 자다 말고 자신의 속살을 내어 주며 몸을 녹여주는 남편의 잠결행동은 감동이었다. 밤이 지나 아침에 일어나 남편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노라 고백을 했더니 남편은 전혀 기억도 못한다. 잘 자는 것에 있어서는 이길 자가 없는 남편이라 참 다행이다.
2014년 8월에 졸업을 했고, 교수로 첫 임용이 된 것이 2016년이다. 임용 확정은 2015년 12월 즈음에 받았으니 경단녀에서 교수로 경력이 전환되기까지 1년 반 정도 걸린 셈이다. 누구에게나 교수 임용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뿐이다. 여러 번의 서류탈락과 면접에서의 아슬아슬한 접전을 경험했다. 특히,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그것도 면접도 꽤나 잘 본 것 같은데 댕강 떨어졌을 때는 한 일주일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아쉬운 마음이 극에 달하면 이제 그만할까 싶을 때도 있었다. 바로 그런 마음이 드는 날, 인로씨와 산책을 하면 남편은 여지없이 나의 마음을 의외의 방법으로 풀어주고 도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 왔어요. 정말 다 온 거예요. 나는 자기가 95%까지 차오른 느낌이 들어요."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어요? 그냥 될 때까지 하는 거죠. 되면 끝나는 거니까 그때까지 하면 돼요."
남편의 메시지의 결론은 이 단순한 두 가지였다.
다 되었다, 정말 고지가 앞에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되어서 한 발만 더 나아가자 싶었고,
될 때까지 하는 거라는 그의 담대한 언어가 설사 지금 내가 1의 위치에 있더라도 시간만 넉넉히 가지면 언젠가는 성취될 길을 가고 있기에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나고 드디어 우리 부부도 맞벌이 대열에 들어서고 나는 경단녀에서 탈출해서 교수가 되었다. 평범한 직장인인 남편이 어느 날 아내가 교수가 되었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는 축하도 있었지만 간혹 남편으로서 좀 주눅 들지 않냐는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인로씨의 반응은 태연하다. 못난 남자들이 아내 잘되면 주눅 드는 거라며, 아내가 잘되는 게 내가 잘 되는 거랑 똑같다고 한다.
남편보다 수입이 더 많은 달에는 남편은 아내가 돈을 많이 벌어와서 너무 좋단다. "형님!"이라며 갑자기 호칭을 바꿔가며 나의 애씀과 노력을 기쁘게 반겨주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 부부 사이에 서로 성장하며 느끼는 기쁨,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나 싶다. 백인로 씨와 살면서 종종 그런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