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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Feb 10. 2024

반환점을 돌고 있는 중년의 남자

우리 이제, 노련하게 살아봅시다.

스무 살의 나의 인생 계획 노트에 결혼은 스물여섯에 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인생살이에는 고수가 없다. 누가 더 잘 사는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다. 혈기왕성한 20대에는 그래서 더 잘 살고 싶었다. 틈만 나면 노트에 인생계획을 세웠고, 지금까지도 그 습관은 계속되고 있다.


요즘은 결혼이 필수인 세상은 아니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 되면서 결혼도 선택이 된 지 오래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결혼은 꼭 해야 하는 인생과업으로 여겼다. 호기심 많던 20대, 결혼의 현실을 몰랐지만 그래도 결혼은 하고 싶었다. 올해 마흔여섯인 나는 그랬다.


결혼 상대를 찾을 때 여러 원하는 조건들을 읊으며 기대하고 바래보지만 결혼도 결국은 운의 영역인 것 같다. 내 인생의 모든 변수들을 내가 통제할 수 없기에 바로 그때에, 바로 그 사람이, 마침 좋았고,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기에 결혼식을 치르고, 진짜 부부가 되고, 인생의 구비들을 함께 넘어가는 벗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저것 다 빼고, 내가 나의 남편 인로씨에게 가장 큰 매력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딱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근육! 둘 다 직장인으로 살던 시절 만났기에 퇴근 후 만났을 때 인로씨는 늘 정장 차림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이 남자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양복 소매를 걷어 올리는데 팔꿈치까지 절반도 채 올리지 못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어찌나 듬직해 보이던지!!! 남편은 대학 4년 동안 공부보다 검도에 더 몰입했던 터라 다른 건 몰라도 손목부터 팔꿈치 사이는 굵고 단단한 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전거, 배드민턴, 검도로 단련된 그의 몸은 부담스럽지 않은,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근육들을 탑재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도 남편의 매력은 잘 유지됐다. 아침잠이 많은 나와는 달리 남편은 아침형 인간이어서 밤새 푹 자고 나면 꽉 찬 기운으로 새벽운동도 힘들지 않게 했다. 거기다 담배는 피워 본 적이 없고 술에 취해 들어온 건 결혼 생활 15년 동안 두세 번 정도였으니 정말 피할 수 없는 업무 상황이 아니고는 술도 마시지 않는 남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은 새벽 운동과 칼퇴근일 뿐.


주말에 온 가족이 모인 집에서 나는 꽉 차서 충만해지는 느낌을 느꼈다. 힘 좋은 남편이 주방에서 거실로 왔다 갔다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신혼 때부터 코로나 때까지도 남편은 해외 출장이 잦아서 집을 지키는 것은 나의 몫이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아이 셋을 데리고 일과 육아, 가사까지 책임지다 보면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게 되니, 남편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휴식이 되기도 했다. 거기다 내 머릿 속의 남편은 언제나 근육이 짱짱한 튼튼한 인로씨였으니까.


그렇게 보기만 해도 든든해 보이던 이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손목과 발목에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엘 갔다. 급기야 입원까지. 원인이 정확하지 않을 때 우리들은 보통 그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한다. 면역력이 떨어졌던 건지, 수개월 주말부부로 지내게 되면서 가족의 지지(보다 정확하게는 아내의 지지)가 부족한 탓인지 덜컥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관찰할 수 있는 남편의 특징 중 하나가 있다. "그렇게 할께요."라고 말하면 그 즉시 변하려고 노력하고 실제로 변한다는 것이다. 치약 짜는 방법, 설거지 후에 정리하는 방법, 옷 거는 방법, 신발 정리하는 방법 등등 서로의 작은 습관들이 부딪히고 맞춰가야 하는 시기가 신혼초기이다. 그런데 이 남편은 "아... 그래요? 그렇게 할께요."라고 하면 아내인 나의 쓰디쓴 잔소리가 더 이상은 필요 없었다. 오히려 잘 안변하는 건 나였고 남편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한 적도 별로 없었다.


건강의 적신호가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너 달을 추적 관리하면서 결국 가장 중요하게 지목된 문제는 당뇨였다. 검사결과들에서 문제가 되는 데이터를 확인한 즉시, 남편은 바로 먹는 것과 먹는 방법, 먹고 난 후의 움직임까지 일상생활의 습관들을 모두 바꾸기 시작했다. 좋아했던 조청유과도 딱 끊어버렸고, 좋아하지 않던 채소의 참맛을 배워 가며 자신의 건강 데이터를 확실하게 관리해 나갔다. 누가 보면 다이어트 식단 같기도 한데, 어찌 됐건 수개월 만에 남편은 모든 적신호를 정상으로 돌려놓고 잘 유지하고 있다.


병원에 가면 담당의사는 남편에게 "저보다 더 관리를 잘하시는데요?"라며 남편의 관리를 응원해 준단다. 남편이 건강을 되찾은 것은 정말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염증 수치가 높아지면서 껶였던 건강은 그렇게나 내가 좋아했던 근육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 건강 적신호 이후 식이조절로 남편의 체중은 자연스레 감소했고 남편 말에 따르면 그저 평범한 정상인의 몸이 된 것이다. 실제로 대면했을 때는 선이 샤프해져서 그럭저럭 괜찮다 싶은데, 유독 사진을 찍으면 튼튼하던 남편은 온 데 간 데 없고 여린 주름살이 도드라진 중년의 남자가 보인다. 그럴 때면 나는 또 "이제 좀 쪄도 되지 않냐?"며 나는 남편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해댄다.


얼마 전, 수년 만에 올림픽공원 산책을 다녀왔다. 1시간 반 정도 되는 산책길을 우리가 걸었던 것이 수백 번일텐데, 난생처음으로 남편이 "좀 멀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내가 달고 살던 말인데, 남편이 먼저 그 말을 하다니! 늘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이 정도는 뭐~"라며 매사에 가뿐하던 남편에게 이제 조금씩 부담스러운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80년생이니 이제 45세인 남편. 나야 아이 셋을 낳고 먼저 맥을 잃고 여기저기 탈이 나기 시작한 지 이미 수해이지만 씩씩한 남편 덕분에 덩달아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남편의 변화는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반환점을 도는 거구나.'

'우리도 이제 젊지만은 않구나.'

'우리도 이제 한계를 경험하는 때가 되었구나.'

뭐 이런 생각이 힘 좋고 튼튼했던 남편이 그 탄성을 잃어가면서 확실히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40대 중반

결혼 16년 차

세 자녀를 양육하며

아직도 책임이 막중한 우리 부부.


강한 힘으로 더 많이 도전하고 더 많이 실수하며 지금껏 살아왔다면, 이제는 좀 노련해져야 할 때가 되었다. 인생의 왕도는 없으나 그간의 실수들이 모여 우리 부부에게는 인생 경험과 노하우로 남아있을 테니까. 좀 약해졌지만 우리 사이의 신뢰는 더 강해졌으니까. 삶을 살아가는 에너지의 방향을 전환하고 좀 더 지혜로워져야겠다는 생각, 나는 약해진 남편을 보면서 다짐하게 된다. 


인생은 근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믿.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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