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후회 없이 잘한 선택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대학, 무슨 전공을 선택할 때 80퍼센트는 성적을, 20퍼센트 정도가 적성을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 같다. 거기다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을 서열에서 고르고, 그 대학에 개설된 학과들을 보면서 차순위로 적성을 고려하여 최종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결정하면 결국은 그다지 관심도 없었던 전공을 선택할 수도 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떤 전공이든 모두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으니 다 '열심히만' 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막상 전공 공부가 시작되면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색안경을 쓰고 외계어에 익숙해져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내가 전문대학교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 2학년 여름방학이 되어 사회복지현장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한 남학생이 실습지원서를 쓰는데서부터 삐그덕거리는 게 관찰됐다. 전문대학교의 존재의 이유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잘 배운 학생이 취업해서 독립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에 있다. 나는 그 남학생에게 사회복지사가 아니라면 졸업 후 어떤 취업계획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집중 지도에 들어갔다. 실습지원서 양식이 우리가 잘 아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닮아 있는데, 상당히 구체적으로 예비 사회복지사로의 개인 성향과 전공 지식 및 자질에 대해 정리되어 있어야 쓸 수 있다. 게다가 실습지로 선호되는 기관들은 취업 못지않은 모집 경쟁률이 있어서 서류와 면접까지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서 지도하는 입장에서도 손가는 게 참 많다.
학기 중에 두 달을 공들여서 준비를 했고 그 남학생도 일단은 성실하게 임했다. 다행히 실습지를 결정했고 4주간의 여름방학 실습을 완수했다.
2학기가 되어 여름방학 실습 경험을 배경으로 더 집중적인 취업준비에 들어갔다. 이 남학생과 취업지도를 위한 상담차 다시 만났다.
"사회복지 할 거니?"
"아니요."
"그럼, 뭘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봤니?"
"자동차 정비요."
"훌륭하다. 사회복지 아닌 걸 확실히 아느라 실습까지 하고 고생했다."
"네."
"네가 자동차 정비가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거라면 넌 누구보다 그 일을 성실하게 잘할 것 같아. 기대된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진로설정을 할 때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일단은 이전의 나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세로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나를 찾아왔던 남학생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두 달 동안 그 친구와 만나 지도를 하면서 내게도 사회복지가 적성에 맞지 않는 친구라는 예감이 있었다. 실제로 이 친구의 진로적정검사지를 훑어봤을 때도 서류업무나 사람 관계가 중요한 사회복지사 직무와는 맞지 않기도 했다. 그렇지만 인생선택지에서 가위표(X)를 확신을 갖고 하려면 대충 해서는 안된다. 사회복지학과에서 1년 반을 버텼지만 그럭저럭 일상이 되면 '세월 보내기'가 대단히 어려운 건 아니다. 그래서 가위표(X)를 예감했지만 이 친구 기준으로 최선을 다하는 경험을 해보기를 바라며 '길 끝'까지 가보게 한 것이다.
졸업 후 이 친구가 연락이 닿진 않지만 나는 왠지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잘 꾸려 나가고 있을 거라 믿는다. 지도교수로서 학생지도를 하다 보면 교수의 진심 어린 조언을 수용하기보다는 꾀를 부리는 학생들도 많다. 그렇지만 이 친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었고 묵묵하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지도교수의 관점이 되어보면 학생이 얼마나 잘하는 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태도이다. 인생길은 너무나 다양하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지만 졸업할 때는 사회복지와의 작별이 너무 반갑다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이 싫지만 버텨내는 노력을 했고 자기 인생의 확실한 길 하나에 가위표(X)를 던진다면 그것도 꽤나 귀중한 성과다. 다시는 그 길로 안 가면 되기 때문에.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어영부영, 대충대충이 만든 가위표(X)는 안된다. 확실한 가위질은 유사한 다른 옵션들을 탈락시키고 인생길의 선택지를 간명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된다.
둘째, 한 번에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엄격성과 경직성을 내려놓아야 한다. 대학생들에게 진로설정은 자기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라 매우 무겁고 복잡한 의사결정을 요한다는 인식이 있다. 학생들의 마음은 갈대 같아서 매 학기 관심분야가 달라지고 저마다 처한 상황들도 참 다양하다. 곁에서 이걸 바라보고 지도하는 교수 입장에서도 인내가 필요하다.
진로설정이 왜 이처럼 어려울까? 실체 이상의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의 경우도 전공 분야 내에서 사회복지사, 연구원, 교수로 직업을 바꾸며 살아왔다. 내가 1년 차 사회복지사였을 때, 4년 후 연구원이 될지 예상할 수 없었고, 연구원이었던 시절에는 7년 후 교수가 될지 몰랐다. 학생도 지도교수도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확실한 설계도'를 그리려 하니 진로설정이 그렇게나 어려운 것이다. 집을 지을 때도 설계도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유능한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계획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곤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실력이 중요한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주관이지만 공시생이 되겠다는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제일 갑갑해진다. 다행히 잠자고 먹는 시간 외에는 공부만 했다는 선배의 사례를 들으면 도전자의 대부분은 포기한다. 나는 공무원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동기에 대해 회의적인 것이다. 이들은 미래 30년을 위해 최고의 도전을 해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보이지만 세상 어디에도 내 인생 30년을 변함없이 만족하게 하는 그 어떤 것이 있을까 싶다. 매우 현실적인 동기이고 납득할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기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인생지도는 계속 변하고 끊임없는 자기 계발은 '생존하는 삶'이 아니라 '생동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첫 직장을 너무 늦게 가질 때 발생하는 기회비용에 대한 고려도 있어야 한다는 꼰대 지도 교수의 마음도 담겨 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은 직장이라 해도 성장의 기회는 찾고자 하는 자는 찾을 수 있다. 20대는 꼭 인생 30년을 걸지 않아도 된다. 정말 인생 30년을 조망하며 살아가는 실력자라면 지금의 기회비용도 계산할 줄 알 것이다.
셋째, 다양한 경험을 충분히 해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적성에 맞는 일들과 그렇지 않은 일들에 대해 경험치를 쌓아갈 수 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이런 기회들은 널려 있다. 바로 자원봉사다. 글로 배운 사회복지로는 노인복지가 너무 어려운데 막상 노인복지현장에 나가서 노인들을 만나면 학생들은 자존감이 급상승한다. 대학생들에게 유달리 호응 좋은 노인들의 반응 특성 때문이다. 또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청소년기를 떠올리며 청소년 분야에 관심을 갖지만 냉소적인 청소년들을 경험하고 나면 생각과 실제는 다르다며 새로운 설계도를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경험치들을 쌓다 보면 변화와 성장을 경험할 수도 있다. 부족해서 실패했던 경험에서 교훈을 얻게 되면, 인생 옵션 가위질이 아니라 대체로 가능한 일이 더 많아지는 의외의 반전이 있을 수 있다. 심지어는 싫었던 것도 좋아지는 놀라운 반전 말이다. 이것은 내 영역이 아니던 새 땅을 점령한 것이다. 땅따먹기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