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흘러 흘러
미루고 미루다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하던 일이 있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하루를 꼬박 들여서 했던 옷장 정리 말이야. 무심하게 쌓인 옷더미. 성가시도록 살살 코를 간질이는 먼지. 귀찮게 자꾸만 튀어나오는 재채기. 온 얼굴 근육을 동원해가며 연신 재채기를 하다 보면 안 그래도 잔뜩 찌푸린 얼굴에 잔주름이 그득그득 잡힐 것만 같았어. 허구한 날 벽장에 위에 앉아 울고 있는 못난이 인형처럼.
빨 옷, 버릴 옷, 담아둘 옷, 꺼낼 옷. 분류해야 할 건 왜 이리도 많은지. ‘으~~~. 누가 나 좀 이 옷장 지옥에서 꺼내 줘요.’ 하소연해봐야 피할 수 없었던 숙명 같은 과제였지. 봄, 여름, 가을, 겨울. 일 년에 네 번씩이나 부지런히 나를 괴롭히던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더라고. 차라리 계절이 하나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했어. 매번 번거롭게 옷장을 뒤집어엎을 필요도, 먼지를 뒤집어쓸 이유도 없잖아. ‘계절을 하나만 택할 수 있다면 난 여름을 택할 거야. 옷들이 전부 얇고 가벼워서 정리도 쉬울 테니까.’하는 부질없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지.
근데 참 희한하다? 정말 귀찮고 피곤한데 정리를 하고 있다 보면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와. 박스 안을 덮었던 신문지를 착 걷어내는 순간! 고이 접혀서 장롱에 묻혀있던 1년 전 기억들이 촤르르 되살아나는 거 있지. ‘저 옷을 입고 학예회 무대에 올랐지. 너무 떨려서 리본 끈이 풀린 줄도 몰랐었는데...’‘앗! 저 내복 가랑이에는 아직도 구멍이 나있네. 키득.’‘작년엔 넉넉했던 코트가 이제는 딱 맞네!’‘작년에 그렇게 예뻐 보이던 세일러문 반스타킹이 이제는 왜 이리 촌스러워 보이는 거지?’
묻어뒀던 옷들을 만지작거리는데 그 계절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만져보는 느낌이었어. 그 해 겨울은 그랬었지. 올해 겨울은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 장롱 냄새, 시간 냄새가 뒤섞여서 익숙한 듯 또 새롭고 오묘한 기분이 들었어. 싫지 않았어. 낯선 듯 또 편안한 기분. 그 적당한 균형감.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바라던 대로 1년 내내 여름이면 참 따분할 것도 같아. 등굣길 따라 핀 노랑 개나리도, 바스락 낙엽 속 보물 찾기도, 따끈한 어묵 국물에 한입 베어 무는 붕어빵도 없을 테니까. 매해 돌아오지만 매일 찾아오지는 않는 사계절이 어쩌면 하늘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싶어. 익숙해서 반가운 동시에 또 새로워서 설레게 하는 계절의 변화가 참 고맙지 않니? 계절은 오늘도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고 부지런히 한 바퀴를 돌아 약속한 대로 반드시 또 돌아올 것이라는 것. 시간과 함께 차곡차곡 쌓인 계절과 우리 사이의 두터운 신뢰야.
이런 계절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는 것도 참 아름답지 않니? 눈부신 봄날과 열정으로 뜨거운 여름날. 세상의 주인이 된 듯 타오르다가도 자만심으로 목이 너무 뻣뻣해지기 전에 가을바람이 툭툭 나뭇잎을 떨어뜨리기도 하지. 앙상한 나체를 드러낸 채 시린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다 보면 봄 햇살이 다시 떠올라 스르르 녹여주잖니. 모든 것은 흘러가고 지나간다는 자연의 섭리가 생각보다 참 큰 위로로 다가와. 적당히 익숙하면서 적당히 새로운 변화의 균형. 시간의 흐름 속에 잔잔히 몸을 맡긴 기약 있는 기다림. 그게 우리 인생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어.
엄마 배 속에서 첫 번째 사계절을 보낸 아가야, 곧 세상에 나오면 그 사계절을 몇 번씩이나 또 만나게 될 거란다. 더 생생하게, 더 포근하게, 더 뜨겁게, 더 거칠게, 더 눈부시게. 그 계절을 너에게 선물하고 싶어. 부디 아프다고 쉬이 낙담하지 말고 기쁘다고 쉬이 자만하지 말기를.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흘러 흘러갈 테니. 계절의 흐름에 너를 맡기고 의연히 살아가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