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전, 후의 분위기
오늘은 송년회 겸 연말 회식을 하고 왔습니다. 12월이 되면 왠지 들뜨는 이유랄까요. 술은 잘 못하지만 술자리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술을 이기지 못해 집에 오자마자 풀썩 쓰러졌을 사람이 따뜻한 차를 타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2015년 첫 회사에 입사를 하고 환영회식을 했었습니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미 만취상태였으니까요. 신입사원의 패기를 보이고자, 조직에 순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고자 최선을 다 했었습니다. 화장실에서 게워내고 다시 마시고 했었습니다. 참 미련했습니다. 그때 잘못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술자리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갓 성인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술자리가 너무 재밌었습니다. 그에 반해 저의 주량은 형편없었습니다. 역사가 쓰이는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귀소본능에 따라 자리를 이탈하곤 했으니까요. 다음 날에 학교에서는 어제의 역사들을 서로 이야기하지만 저는 모르는 역사입니다. 선천적으로 술이 안 받는 내 간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주량을 늘리기 위해 매일 트레이닝도 했습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과방에서 술을 마시고 오후 수업에서 시뻘건 방울토마토가 되어 그냥 엎어져 잤습니다. 술이 좀 깰 즈음 수업이 끝나면 다시 과방으로 가서 술을 마십니다. 그러고 또 뻗어서 자다가 저녁이 되면 또 술자리로 갑니다. 이런 패턴을 한 달간 했습니다. 트레이닝을 하던 어느 날 하교 길에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바닥에 앉아 한동안 앉아있었던 기억은 생생하게 납니다.
주량은 늘어납니다. 제가 증명했습니다. 저는 어느새 자정의 역사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20살의 패기로 즐거운 1학년 생활을 했습니다. 물론 성적은 반비례했지만요.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니 다시 원래의 주량으로 돌아갔습니다만 다시 그 미련한 짓을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자면 나를 인사불성으로 만드는 회식은 자주 있었습니다. 20살의 나는 내일이 없었지만 신입사원인 나는 내일이 있습니다. 다음날의 숙취와 오늘의 귀가가 두렵지만 회식은 원래 인사불성이 되는 것이니까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회식을 열심히 참여하고 패기를 보인다면 당연히 상사들은 저를 좋게 봅니다. 커피 한잔하러 갈 때 일부러 찾아서 데리고 가주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어드벤티지가 많이 생깁니다. 하지만 회식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저의 근심도 같이 늘어났습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지듯이 제 간은 황새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지금의 회사에 입사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전의 회사에 비하면 양반이긴 했으나 힘든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술을 빼지 않아야 했고 그것이 미덕이고 도리였으니까요. 겉으로는 즐거운 척했습니다만 고역이었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분들은 20살의 내 대학동기들이 아니니까요.
회식은 원래 자정을 넘기는 것이고 모두가 술에 만취해야 했으며 먼저 빠지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20년 새해가 밝고 어느 날이었을까요. 뉴스가 온통 코로나로 도배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식당에는 투명 칸막이들이 날을 세운 체 서있었고 모두가 코와 입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회식은커녕 4명 이상이 모이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으며 어느 날부터는 회사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이 무섭고 어리둥절한 상황은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이슈들이 있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이슈, 52시간 근무제 등 우리가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았을 때에는 회사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묵살되었을만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징계위원회로 회부가 됩니다. 갈등을 묵히지 않고 표면으로 나타내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진짜들이 나타났습니다. 팬데믹 이전의 미덕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회식에 대한 회사의 지침도 같이 내려왔습니다. 회식은 1차만 하며 참여 강요불가, 음주 권유불가 라고 합니다. 물론 이 지침을 귓등으로 듣고 예전 방식을 고수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만 결말은 좋지 못했습니다. 본보기가 나오니 어쩌겠습니까. 이제 바뀐 분위기에 적응들을 하셔야 합니다. 때마침 당돌하게도 불참선언을 하는 신입사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좀 억울했습니다. 이제 요령을 좀 부릴 단계가 되었는데 왜 이제야 이렇게 된다는 말인가.
결과적으로는 이제 회식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회사 동료들과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며 반주를 곁들이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소갈비에 소맥 몇 잔 걸쳤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와이프한테 줄 뚱뚱한 마카롱 4개를 샀습니다. 봉지 손잡이를 손목에 끼운 다음 양손을 호주머니에 숨기고 잔뜩 움츠려 쌀쌀한 바람을 이기고 집에 왔습니다. 이렇게 맨 정신으로 회식 후 글을 쓰고 있는데 제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음주를 강요하지 않고 자기 주량껏 기분 좋게 먹고 헤어질 수 있다니 정말 이상적인 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