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드라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은 Feb 26. 2022

친절하고 이상한 나의 히어로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리뷰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 작가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상하고 아름답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이 드라마는 원작 소설의 두터운 팬층과 소설의 독특한 매력을 영상에 잘 녹여낸 이경미 감독의 연출에 힘입어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주인공 안은영과 홍인표를 완벽히 담아낸 배우 정유미와 남주혁의 역할도 컸다.



    안은영이 보는 세계는 특별하다. 그녀가 보는 세상은 늘 젤리로 가득하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세상에 귀엽고 무해한 젤리들만 있다면 은영이의 삶은 좀 더 수월했을 테지만, 젤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마음이란 게, 정확히 말하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생각과 마음이 늘 좋을 리 없는 법이니 세상에는 당연히 나쁜 젤리들도 존재한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안은영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야 했다. 사람에게 유해한 젤리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책임감에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젤리들과 사투를 벌이며 살아왔다. 그렇게 그녀는 장난감 칼을 허공에 휘두르고, 비비탄 총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되었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았거나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매일 욕을 입에 달고 살고 매사에 귀찮다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정작 학생들에게 위험한 젤리가 나타나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안은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보건교사 안은영>을 사랑해 마지 않는 이유들을 이 글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1. 친절한 이들의 질 수밖에 없는 싸움







    <보건교사 안은영>은 온통 친절함에 관한 이야기다. 은영이 젤리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것 역시 그녀가 세상과 사람에 대해 베푸는 친절이다.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도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원망하고, 젤리와 싸우면서도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은영이지만 그럼에도 은영은 젤리와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울 수 없는 일에 슬퍼하기도 한다. 이건 모두 은영이 친절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극중 은영과 가장 대조적인 인물이 바로 '매켄지'인데, 은영과 동일하게 젤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은영과는 달리 그 능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극 중 매켄지는 은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보, 너 호구냐? 넌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돈 되는 일을 해야지, 이 사람아. 없애지 말고 캡쳐해서 팔아요, 선생님. 다들 돈 받으면서 일한다고."

<보건교사 안은영> 中



    특별한 능력을 선하게 사용하려는 사람이 듣는 말 치고는 조금 가혹하지 않나 싶지만,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착하게 살면 손해라는 말,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를 '호구 같다'고 칭하는 말, 흔한 동시에 폭력적인 이야기다. 개인의 인간다움을 지켜주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주는 사람의 선함을 깎아내리고 매도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동화나 만화영화처럼 세상도 권선징악의 이치를 따른다면 좋겠지만, 현실이란 애달프게도 선보다 악이 더 승리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친절한 이들이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세상에서도, 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친절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선함의 강함을 느끼게 한다.






2. 미성년자들을 지키는 어른들의 이야기






    "선한 어른들이 아무 대가도 원하지 않고 미성년자들을 지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정세랑 작가가 밝힌 원작 <보건교사 안은영>의 집필 의도다. 상식적인 세상에서 어른이 미성년자들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선 이런 상식이 당연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 어른이 자신보다 약한 미성년자를 보호하기는커녕 미성년자를 해치기도 하고, 나쁜 길로 끌어들이거나 그들의 고민과 마음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보건교사 안은영>은 소중한 드라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 능력이 지긋지긋하고, 젤리가 보이지 않는 평범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끝내는 나쁜 젤리로부터 학생들을 지키는 안은영이란 어른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하다.


    젤리의 영향으로 학교의 모두가 이상해지고 선생님들조차도 학생에 대한 차별적이고 인격 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던 순간에 이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는 인표가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 역시 그런 이유다. 아이들이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공간인 학교를 좋은 어른들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든다.








3.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는 씩씩하고 명랑한 유쾌함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가란 말이야.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보건교사 안은영> 中





    어릴 때부터 젤리를 봐왔던 은영에게 세상은 공포스럽고 기괴한 공간이었다. 젤리를 보는 은영의 세계를 이해해주는 강선이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랬다. 젤리에 둘러쌓인 세상에서도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가라는 강선의 말을 들은 뒤로 은영의 세계는 조금이나마 유쾌하게 변한다. 은영이 장난감 칼을 휘두르고, 비비탄 총을 쏘는 보건교사로 성장한 데는 어린 시절 만났던 강선 덕도 있을 것이다.


    이경미 감독이 그리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시청자들을 은영이 보는 세계 속으로 끌어당긴다. 특히 드라마의 초반부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집어삼키려 했던 거대한 괴물 젤리와 싸운 후 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하트 젤리들은 비현실인 동시에 동화처럼 아름답다. 안은영을 연기한 정유미 배우는 그것을 '은영이 받은 선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은영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 드라마는 늘 어딘가 낡고 지쳐 보이는 어른이자 직장인 은영과 인표, 그리고 어딘가 칙칙하고 음울해보이기까지 하는 영상미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경미 감독의 연출작들이 보이는 특유의 명랑함과 씩씩함을 잃지 않는다. 젤리를 향해 장난감칼을 휘두르는 은영과, 갓을 쓰고 한문을 가르치는 인표, 그리고 목련고등학교의 학생들의 명랑함까지,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건강한 씩씩함은 이 드라마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ost들 역시 이 드라마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4. 평범하고 싶은 이들에게







    "난 평범한 거 재미없던데. 나쁘지만 않으면, 이상한 편이 더 좋아요."

<보건교사 안은영> 中





    은영은 늘 평범함을 꿈꿔왔다. 그녀에게 평범함이란 젤리를 보지 않는 것이었고, 남들을 돕고 살아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는 것이었다. 드라마의 후반부, 강선의 죽음 이후로 은영은 잠시 젤리를 보지 못한다. 젤리가 보이지 않는 평화롭고도 안전한 세상에서 은영은 행복을 느낀다. 평범해지니 좋다고 말하는 은영에게 인표는 말한다. 나쁘지만 않으면 이상한 편이 더 좋다고, 악한 것만 아니라면 평범한 것보다 독특한 편이 더 좋다고. 이상한 당신이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은영은 압지석을 뒤집고 난 후 다시 보이는 젤리들에 울며 절망하고 억울해하지만, 분명 은영을 비롯한, 이 드라마를 보는 많은 이상한 이들은 인표의 말에 위로받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에 따라 조금씩은 이상할 수 밖에 없기에, 누군가의 평범함이 누군가에겐 특별함이 된다. 나쁘지만 않다면, 누구나 마음껏 이상해도 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5. 친절하고 이상한 나의 히어로






    안은영은 우리가 봐온 화려하고 멋진 히어로들과는 다르다. 세상을 지키겠다는 대단한 사명감이 있지도 않고, 오히려 남들을 도와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매일같이 투덜거린다. 매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평범한 하루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장난감 칼을 휘두른다. 능력을 악용하는 이들에 분노하고, 사람보다 크레인이 비싸다는 말에 슬퍼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는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학생들을 돕는다.


    우리가 안은영이란 히어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은영이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은영의 세상은 평범하지 않지만 은영 자체는 보통 사람에 속한다. 대단히 선하거나, 대단히 악하지 않다. 세상에 대한 선함과 친절을 베풀며 싸워도, 때로는 인생과 세상을 원망하고, 지치고 무너져 주저앉기도 한다. 매일 욕을 달고 살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나아가는 은영의 모습은 보통의 우리들을 닮았다. 그렇기에 주저앉아 울어도 결국 다시 일어나 젤리와 싸우고, 운명이 원망스러워도 세상에 대한 친절을 포기하지 않는 은영을 우리는 응원할 수 밖에 없다.


    은영이 가진 능력은 초능력이라고 할 만큼 거창하지 않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젤리를 보는 것, 장난감 칼을 휘두르고 비비탄 총을 쏘며 젤리와 싸우는 것, 단지 그것 뿐이다. 빔을 쏘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악당과 싸우는 히어로와는 조금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교와 학생, 그리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고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은영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보건교사의 흰 가운에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가지고 다니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보건교사 안은영>을 인생 드라마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사랑하지만, 이 드라마에 대해 불호를 표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개성이 뚜렷한 드라마에 흔히 따라오는 강한 호불호다. 특히 <보건교사 안은영>은 드라마에 쓰인 ost만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독특한 연출이 드라마에 가득하다. 나에겐 지극히 드라마의 강점이자 장점으로 다가왔던 부분이다.


    원작을 읽지 않고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중간중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이경미 감독이 연출한 의도적인 공백이다. 드라마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오리 등은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설정들이다. 나는 이것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성을 이용한 이경미 감독의 새로운 연출이라고 느꼈다.


    OTT 서비스의 오리지널 드라마는 기존 드라마와 달리 매주 방송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정주행으로 한 번에 시청하는 이들이 더 많다.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고, 필요하다면 원하는 부분을 돌려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런 OTT 드라마의 특성은 시청자들을 훨씬 높은 강도로 드라마에 참여시킨다. 이경미 감독은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기존 드라마의 설명적인 특성을 없애고, 덜어냄과 여백을 통해 시청자들을 드라마 안으로 더욱 깊이 끌어당긴 것이다. 물론 기존 드라마에 익숙한 이들에겐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미디어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유의미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에 흠뻑 빠져 드라마를 보고 나면, 어딘가에 안은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영 같은 좋은 어른이, 친절하고 이상한 히어로가 이 세상에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내가 은영이처럼 친절을 잊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은영과 인표도, 우리도 친절함과 다정함이 저평가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는 꼭 <보건교사 안은영>의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리뷰를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 되면 괜찮아질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