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차계약기간 중 이사 갈 수 있나요?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제일 긴 사람
(...)
하루의 고단한 날개를 접고
지금 내 품안에 단잠 둥지를 틀었네
작은 파랑새여
아내여
- 정연복, <파랑새> 중에서
그분은 이제 곧 아빠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상담 내내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를 향한 애정이 묻어났습니다.
“와이프가 임신을 했습니다. 배가 점점 나오는데… 집이 언덕 꼭대기에 있어요. 저녁마다 집으로 올라오는 게 너무 힘들어져서… 만삭 되기 전에 언덕 아래로 이사 가고 싶어요.”
두 사람은 어려운 형편에도 사랑을 지켜온 연애 8년 차, 결혼 2년 차인 신혼부부였습니다. 양가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기에 결혼할 집은 두 사람이 모은 돈으로만 마련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선택할 수 있는 집은 많지 않았고,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주택이 그들의 첫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운동도 되고, 뒷동산 오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며 깔깔 웃으면서 출퇴근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을 하고 몸이 무거워지면서, 그 언덕은 점점 더 가파르게, 더 길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아직 계약기간이 남았지만… 이사를 가고 싶어요.” 그분의 목소리는 애틋했고, 절실했습니다.
그분은 임대인의 허락을 받아 계약기간 전에 이사를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임대인의 허락이 없으면 계약기간 전에 이사를 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임차인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몇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계약서에 약정해지권이 있는 경우에는 임대인의 허락이 없더라도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가 가능하며, 주택임대차법에 규정된 바에 따라 묵시적으로 갱신된 계약이라면 임차인은 언제든지 계약해지를 통지할 수 있습니다. 계약기간이 남아 있어 임대인이 손해를 본 경우라면, 예를 들어, 남은 기간의 월세나 새로운 임차인을 구하기 위한 추가비용 등은 임차인이 부담하여야 합니다. 즉, 배상할 것을 배상하면 임차인은 계약기간 중에도 이사를 갈 수 있습니다. 임차인이 집을 비워주면 임대인은 보증금을 반환해야 합니다. 두 의무는 ‘동시이행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법적 구조는 현실 앞에서 종종 힘을 잃습니다. 임차인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새로운 집을 구할 돈이 없고, 임대인도 손에 현금이 넉넉하지 않아 바로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양측 모두 ‘먼저’ 내놓을 돈이 없는 구조에서 법이 말하는 동시이행은 사실상 불가하고, 실질적인 해결책은 새로운 임차인이 등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 저는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계약서에 약정해지권은 없었나요?” 그분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공인중개사가 제시한 표준계약서 그대로 서명했다고 했습니다. 임대차계약은 단순히 집을 빌리는 서류가 아닙니다. 주거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 건강, 가족, 생계 등 삶의 절반 이상을 좌우하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임대차계약 표준계약서는 지나치게 짧고 단순하며, 살면서 생길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는 반영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당사자만 남게 되고, 대개의 경우, 임대인보다는 임차인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임대차는 생활의 기반을 정하는 중대한 계약입니다. 그렇기에 계약 단계에서부터 예방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분에게 당부하였습니다. “앞으로는 계약서를 쓸 때, 꼭 나중에 생길 일도 함께 고려하셔야 합니다. 특약에 약정해지권을 넣고, 계약당사자의 사정을 반영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네요. 결국 보증금을 받아 이사를 가려면 임대인 분께 사정을 드리고 부탁드려야 하네요.” 그 미소는 씁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법을 다툴 때 쓰는 무기로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다툼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계약서는 그 첫 번째 방패입니다. 만약 이 부부가 처음 계약할 때, 특약에 약정해지권을 넣어두었다면, 지금처럼 불안 속에서 임대인의 호의만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문제가 생긴 뒤에야 법을 찾지만 사실 법이 가장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문제가 생기기 전입니다.
상담실 문을 나서는 그의 걸음에는 만삭의 아내를 향한 책임감과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이 모든 현실을 완벽히 해결해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다음 임대차계약을 쓰실 때는, 두 분의 삶을 지킬 장치들을 꼭 넣으셔야 합니다.”
그분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그분의 다음 보금자리에는, 조금 더 단단한 내일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 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