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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Sep 16. 2024

천사의 기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삭 성당

 러시아는 주사위를 던지며 세계 도시를 다니는 부루마블 게임에서나 가볼 수 있는 머나먼 나라라고 생각하던 때 그곳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의 초청으로 가볼 일이 생겼다.

 1990년대 당시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노선에서 벗어나 개방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주변에서 다녀온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미지의 나라였고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었던 우리 가족은 설렘 속에 여행을 준비했다.

 한국 사람이 러시아를 이야기할 때 흔히 떠올리는 두꺼운 가죽과 무성한 털로 된 겨울 코트를 어머니께서 동대문 시장 옷가게에서 용케 구해 오셔서 우리 네 사람(어머니, 우리 삼남매)이 각자의 털코트를 입고 모여 있으니 곰 네 마리 같아 영 우스워 보였지만 러시아 여행을 가기 위한 구색을 잘 갖춘 것 같기도 했다.

  러시아 항공사 에어로플로트의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고 가는 시간 내내 싱숭생숭하니 묘한 기분이었고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 땅을 지날 때는 아래쪽 구름이 걷히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설원이 펼쳐진 모습을 창문으로 보고 경이롭다 못해 공포심마저 들었다.


 모스코바아에 도착해서 식사했던 장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는데,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듣자 하니 러시아 안에는 마피아 조직들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지난번에 다른 한인 식당은 마피아 조직에 밉보인 바람에 일하는 여성 직원을 한 명을 빼고는 총으로 몰살을 당했다는 흉흉한 이야기였다. 모스크바에서 볼쇼이 오페라단과 볼쇼이 발레단 등의 공연을 보고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는 건설 현장으로 이동했다. 땅 덩어리가 워낙 큰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할 때면 하루 온종일 승용차를 타고 끝도 없는 벌판을 달리기도 했고 기차를 타고 일박을 한 뒤 다음 날 도착하는 등 광활한 규모를 체감하며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러시아에서 놀라웠던 사실 중 하나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정도의 여성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백인 미녀, 옛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공주같이 생긴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여성 중에는 털코트, 털모자에 긴 부츠, 진한 화장과 향수 등으로 화려하게 꽃단장을 하고 다니는 겨울 멋쟁이들이 많아 도시 곳곳을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십 대 초반 젊은이였던 두 남자 형제들은 러시아에 있는 동안 여행 다닐 맛이 났을 것 같다.

 아버지의 건설 현장은 보로네쉬라는 지역의 아무것도 없었던 평원에 거대한 도시를 짓는 프로젝트 중이라 컨테이너로 된 가건물들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가건물에 다국적의 프로젝트 매니저, 사원들, 인부들이 숙식을 하며 지내고 있었고 한국 프로젝트 매니저로 계셨던 아버지의 숙소는 제법 널찍해 대학생 삼 남매가 러시아 치즈와 보드카를 맛보며 늘어지게 게으름 부리며 지낼 수 있었다. 사소한 수다와 보드 게임 등 소일거리를 하며 지루함을 달래다가 아버지께서 시간을 내실 수 있을 때 함께 러시아의 두 번째 중요한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관광 안내 책자 속 이삭 성당의 모습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동상들이 즐비하고 모스크바와 달리 예술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도시였다. 이곳에는 세계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힌다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있어서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들 찾는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미술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나를 위해 에르미타주를 첫 번째 코스로 갔는데 궁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라 실내 장식이 화려했고 방대한 공간 속에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장된 미술 작품 수가 많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다녀도 예정된 시간 안에 다 볼 수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삭 성당을 방문했는데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라 그런가 무언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황금색의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상들, 이콘화들이 즐비했고 둥근 돔으로 된 지붕과 높다란 기둥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공간을 올려다보면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30년이 흘러 그 옛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았던 이삭 성당에서 느꼈던 감흥을 소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건물 자체의 웅장함에 감동했던 순간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떠올랐다. 해상도는 낮지만 그 공간을 촬영한 나의 사진도 있었기 때문에 이삭 성당의 지붕 부분을 올려다보는 각도로 그리기 시작했다.


 2022년 2월 24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지금까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참전한 군인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나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발발시킨 만행으로 인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질타를 받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보았던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 오페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았던 예술적인 건축물, 작품 등에서 문화 강국의 강한 저력을 보여주었던 러시아가 이제 폭력과 야만을 대표하는 나라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내 사진에 담긴 이삭 성당 지붕 주위의 천사들은 경직된 자세인 데다 사진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성당 내부 벽화에 그려진 천사들의 모습을 그림 속으로 초청했다. 저마다 역동적인 자세들을 취하고 있는데 십자가를 들고 슬픈 표정을 짓거나 하늘을 향해 손을 뻗거나 기도하는 모습들이다. 지붕 아래의 거대한 여백과도 같은 어두운 공간에 폭풍우 칠 때의 파도와 번개의 형태를 살짝 표현함으로써 문화예술의 나라에서 폭력을 자행하는 나라로 변질된 러시아의 암울한 비극을 암시했다. 아름다운 옛 러시아의 문화를 대표하는 이삭 성당의 지붕에 있는 천사들이 살아있다면 안타까운 역사 앞에 눈물 흘리며 슬퍼하지 않을까 평화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지 않을까 상상한다. 나 또한 우크라이나 땅에 평화와 회복이 찾아오기를 기도해야겠다.


<천사의 기도> 60.6 x 72.7 cm acrylic on canva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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